야고보서(완료)

약5:13-14(22.04.29.금)

은혜바라기 2022. 4. 29. 08:45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오늘 묵상은 매우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서신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서신서 중에서도 ‘행위’를 간략하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더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도록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고난 당하면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이 초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면서 기도하셨고 그 분의 신부인 교회를 찾을 때 즐거워 하시면서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면 예수님을 찾게 되는 기도를 하게 되고 그 고난이 ‘복음’으로 해석되는 순간 인생이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므로 찬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방향에서 풀면 ‘능동태’이지만 우리의 방향에서 풀면 ‘적극적 수동태’입니다. 즉,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우리의 허리띠를 끌고 가시면서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형태죠. 이렇게 한 말씀을 가지고 능동태와 수동태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성경에 쓰여진 헬라어라는 글은 '중간태'의 문법이 존재하는 언어입니다. 재미있죠?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을까요? 절대 없습니다. ‘만약’ ‘혹시’라는 말도 해당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셔서 산 삶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신 이유는 우리도 그런 고난의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실체라면 우리의 고난은 그림자일 뿐이죠. (그럼에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나의 본질이 나의 옛 자아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잘 설득시켜서 변화시키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선택받은 자들이 복음의 눈을 뜨면서 한 눈끔씩 알게 되는 비밀의 책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에게 ‘고난’이 오면 자연스럽게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 고난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속삭인다는 것입니다.(물론 고난의 시간은 성령께서 그 사람의 상황에 맞추어 정하시겠죠)이것을 ‘기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복음’을 알아듣고 즐거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찬송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즐거움은 거듭난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죠.)

 

 우리는 '기도'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소원을 비는 행위로 알고 있죠.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도의 정의는 하나님과 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특히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그 모습을 성경에 기재하여 우리에게 그 본질을 가르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공간적의 의미로 산은 '땅과 분리되어 하늘로 솟아 있는 ~~' 이므로 인본주의와의 분리를 뜻하죠. 시간적 의미로 새벽은 '어둠과 빛을 나누는 때~~'이므로 이것도 인본주의와의 분리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의 속성'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하나님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항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단지 그 기도의 속성이 인본주의와의 단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아들 서울대 보내 주세요.'라는 식의 대화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복음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시어 더욱 예수님을 소망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좋겠죠. 이것은 짧은 기도 예시일 뿐입니다. 기도의 영역은 사실 굉장히 넓습니다. 정확하게 기도는 항상, 쉬지말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묵상이라고도 할 수 있죠. 즉,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 내내 말씀을 매칭시켜 온종일 묵상을 해 가는 순례자의 삶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새벽예배(기도)는 그냥 '프로그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필요할 때 이용하면 되는 것. 그 정도로만 여기시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런 '노력'을 하면 항상 복음과 오히려 멀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소망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노력의 기도'는 그것을 이행한 후 '내가 오늘도 잘 했다.'로 남게 되죠. 더 재미있는 본질을 꺼내 볼가요? 오히려 새벽예배를 가겠다고 굳게 마음 먹고 2-3일 다니다가 못 나가게 되면서 '내가 이 정도도 못하는 존재구나~~ 정말 나는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구나~~ '를 알게 되어 복음을 보게 되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설명한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죄인들 속에서 예수님은 매일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멀리하시고 늘 죄인, 창녀, 새리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기도)를 하곤 하셨죠.) 사탄의 제 1 목표는 예수님께 집중 시키지 않고 교회(프로그램, 제도, 규칙, 사람)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한 에피소드가 바로 구약의 광야시절 '송아지 우상'이었죠. ((잠깐 이중괄호로 이 부분을 부분 묵상하죠.))

 

 (( 말씀을 받으러 올라간 모세를 잊고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들 어이가 없으시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 에피소드를 좀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말씀을 받으러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유대인들은 좀 더 빨리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오기를 기다렸겠죠. 그래서 그 당시 근동 지대 종교에서 행했던 방법 중 한 가지를 가져 온 것 뿐입니다. 즉, 자신들의 신께서 빨리 내려오게 만드는 자리(송아지의 등)를 자신들이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죠. 즉, 몇 몇의 지도자(학자, 목사)가 이것을 알게 되어 하나님이 더 빨리 내려올 수 있는 자리(송아지등, 프로그램, 제도, 규칙)인 송아지를 만들기를 선언했죠. 그러나 백성(성도)들은 그 송아지를 보고 그 송아지에 꽂혀서 그것에 빌기를 노력하게 되죠. -- 이것이 지금의 교회 모습입니다. 

 이후 말씀 돌판(예수님)이 내려오다가 이 모습을 보고 깨져 버리죠.(십자가) 왜냐하면 돌판의 계약서가 그대로 내려오면 계약서에 적힌 대로 유대인들은 모조리 죽게 되기 때문에 그들 대신 돌판이 깨진 것,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먹먹하시죠?  이런 복음을 이해셔야 합니다. 이런 복음을 제껴 두고 지금도 교회의 프로그램(송아지)에 매달려 '노력'을 쌓는 것에 집중하지 마세요. ))

 

 ‘병든 자가 있다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암에 걸린 성도가 있다면 최장로, 박장로를 청해서 기도 받아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이 표현한 이유는 인간이 이런 행태를 항상 해 왔기 때문에 가장 쉽게 이 장면을 떠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그렇게 계속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으라는 심판적 요소도 들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은 성령께서 오셔서 이 말씀의 본질을 알게 하여 주시는 방법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병든 자’의 본질은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이 계속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인본주의라는 누룩에 계속 감염이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체의 죽음’이라는 선을 넘기 전까지 우리의 옛자아와 함께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항상 인본주의에 감염되어 살게 되죠. 그 때 교회의 장로, 즉 교회의 가장 높은 사람, 즉 예수님(성령님), 즉 성령(가장 높은 분)께 복음(가장 높은 원리)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고 묵상하도록 부탁(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일이 잘 안 풀릴 때 기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죠. 이 맥락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14절 후반에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름’은 성령입니다. ‘주의 이름’은 당연히 예수님이죠. 즉, 이 말씀은 복음의 가장 윗 단계인 ‘예수님’에 대하여 성령께서 그 병든 자를 위하여 다시 이해시키고 알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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