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1-5(22.05.06.금)

은혜바라기 2022. 5. 6. 08:3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는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를 궁금해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정말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누가 사도행전을 쓴 것인가도 생략되어 있고 데오빌로가 누구인가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직 ‘데오빌로’라는 이름만 덩그라니 놓여있죠. 우리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시각으로 성경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 성령께서는 ‘데오빌로’라는 글을 가장 처음에 적어 놓으셨을까? 에 대한 묵상입니다. ‘데오’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빌로’(필로스)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책이란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누가'가 평소 잘 알고 지냈던 고위관직을 지낸 어떤 인물 중 데오빌로라는 자에게 편지를 하도록 하여 사도행전을 집필하신 것이죠. 사도행전의 이런 패턴을 잘 이해하여야 초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데오빌로, 즉 '하나님의 사랑, 즉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로 사도행전을 시작하여 1-2절의 내용은 이 사도행전은 바로 ‘복음서’에서 가르친 예수님의 복음에 근거하여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 후에 사십일 동안 많은 증거로 살아 계심을 보이셨다.’고 나와 있죠. 여기서 40일은 이 땅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 전부를 말합니다. (4는 ‘땅(인생)’을 가리키는 숫자고 ‘10’은 완전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동안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같이 계셨다가 승천하신 것을 읽으면서 ‘그 40일 동안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만 궁금해 하면 ‘진짜 예수님의 의도’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안에 등장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신부들을 위하여 셈플링 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죠. 그래서 이 3절의 촛점은 바로 ‘우리의 인생(40일) 내내 예수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는 말씀도 ‘그들’이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실체는 바로 ‘우리’입니다 ‘나’입니다.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복음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뜻이죠. 

 그런데 4절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약속한 것은 ‘성령님’입니다. 오직 이 성령님을 통해서만 복음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죠.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할까요?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는 말일까요? 이제 조금 어렵습니다. 잘 들으세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의 뜻은 평강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평강의 왕'이기 때문에 이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의 본질은 ‘예수님의 품’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이 말을 연결하면 ‘예수님의 품을 떠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것도 할 것이 없다. 그러니 어떤 ’행위‘라는 것을 해서 예수님의 품으로 부터 ’떠남‘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것을 기다려라’라는 말씀을 하시죠. ‘기다려라’가 바로 포커스입니다. 인간이 가장 못하는 것이죠. 

 5절 이렇게 기다리면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것도 인본주의 종교의 시각으로 보면, 무당이 잡신들린 것처럼 성령이 나에게 빙의되는 것 처럼 생각하기도 하죠. 그러나 세례는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를 죽이고 복음의 진영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는 ‘깨어 있게 됨’ 혹은 ‘눈을 뜨게 됨’으로 표현 되기도 하죠.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인본주의의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최종 목적은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남편이 아주 잘 해주고 만족스러우신가요?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속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현실의 남편이 너무 부족하고 불만스러우신가요? 그것을 통해 완벽한 남편 예수님을 소망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의 모든 삶은 선택된 자들에게 예수님을 소망하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예수님이 도구가 되어서, 예수님이라는 신을 통해 ‘잘살기, 병낫기, 인격자 되기(명예), 칭찬받기(인기)’를 소망하죠. 즉, 인본주의 꼭대기에 오르기를 소망합니다. 완벽하게 반대로 길을 걷죠. 이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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