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승천하는 모습을 ‘종교적 이미지’로 바꾸어서 ‘역시~~ 예수님은 신이셨어~~ ’ 라는 방향성은 완벽하게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포장하여 우리에게 ‘억지 하나님’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나타내 보이신 에피소드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첫째 포인트는 바로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다.’입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하죠? 기독교가 예수님을 보려고 하지 말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christ)’라는 단어를 중국어(한문)에서 소리만 표기한 단어입니다. )
불교인들은 부처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종교활동을 합니다. 무당들도 그들이 모시는 신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종교활동을 합니다. 여기에 제가 하나 더 추가하죠. 기독교도 예수님을 신으로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종교활동을 합니다. 질문입니다. 기독교는 무당과 무엇이 다르죠?
우리는 종교적 신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종교활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에요. 예수님께서는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그 복음을 알게 되어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어렵죠?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타 종교처럼 예수님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가 아입니다. 참 기독교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학생 때 암기과목을 외우던 기억이 있으시죠? 그때 ‘무조건 암기하지 말고 이해를 먼저 해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왕 ‘조’와 종‘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조‘는 ’시작했다‘의 의미로 건국이나, 국가의 제도 혹은 전통을 새로 세운 왕에게 부여했죠. ’종‘은 ’잘 따랐다.‘의 의미로 나라를 잘 유지하고 선대의 왕명을 잘 따른 왕에게 부여한 것이죠. 그래서 나라를 건국한 이성계는 태조 이성계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건국한 나라를 잘 이어받아 유지시킨 이방원은 ’태종‘이 되는 것이죠.
갑자기 왠 역사 공부 !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태조 태종'을 그냥 암기하여 주문처럼 외우는 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고 조와 종의 차이를 알아서 이성계와 이방원의 정체성을 엿보는 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심각하게도,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님’을 암기과목과 같이 그냥 ‘십자가에서 죽은 신’으로 외우고 그것을 상상하며 기도하고 종교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이런 식의 신으로 바라보며 상상하며 종교활동을 하는 것을 차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지말라’라로 표현했죠. 거기다가 ‘구름으로 예수님을 가리어 보이지 않게 했다’고도 덧붙여 설명되어 있죠.
그리고 다시 10-11절에서 이 부분에 관하여 매우 단호하게 설명됩니다. 즉,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합니다. 이때 이 제자들의 모습을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라고 표현되어 있죠. 이것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표현하면 ‘교인들이 교회에 서서 예수님이라는 신을 자세히 상상하면서 손들고 기도하고 있는데’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이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라고 책망하죠. 즉, 종교적 예수님을 보지 말라고 승천시키셨고 그것도 모자라 구름으로 가려버렸는데도 어찌하여 그것을 계속 쳐다 보고 있는가? 라고 책망하죠.
그 이후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하죠.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조금 자세히 번역하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방법을 너희가 전부 다 보았지? 그 예수님이 그 방식 그대로 다시 올 것이다.’라고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공중을 훨훨 날아올라서 멋찌게 구름 속을 통과하여 승천하신 것처럼 내려올 때도 역순으로 같은 방식으로 내려 올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말세에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예수님이 영웅의 모습으로 짠~ 하고 내려올 것을 예상하죠.
그러나 여기서 말씀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방식’이란 바로 예수님이 복음의 사역을 완성하고 하늘로 올라간 방식대로 다시 하늘에서 성령께서 복음을 들고 내려와서 우리에게 그대로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 정체성인 복음, 즉 하나님의 은혜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인간의 죄성은 그런 예수님을 '우상의 자리'에 놓고 서서 우러러 보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의 종교생활을 하기 원하죠. )
오늘의 묵상은 매우 깊습니다. 거의 복음의 마지막 확장성 단계에 와 있을 만큼 깊은 묵상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복음을 모르면, 오늘의 묵상은 완벽하게 오해할 수 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