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사도행전의 패턴을 절대 잊으시면 안됩니다. 사도행전은 잘 못 읽으면 인간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를 이용한 성령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연극으로 비교하면, 연극배우의 선, 악의 행위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12절에서 성령께서 말하고 싶은 의도가 보이세요? 제자들이 ‘감람원’에 있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에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에 2,000규빗(약 1키로) 이상을 걸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감람원에 있던 것이죠. 이들은 아직도 인본주의 종교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라는 성령의 매우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엄중한 메시지로 경고를 해도 우리는 그 다음 13절을 99% 오해하게 됩니다. 그 내용은 바로 제자들이 다 모여 ‘기도’에 힘쓴다고 되어 있죠. 지금 성령께서는 이 13절의 ‘기도’ 행위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책망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딱 한가지 지시를 내린 것이 바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장소’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품’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복음만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설명해주고 이끌고 갈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하는 행위’를 쌓고 있죠.
인간이 가장 못하는 것이 바로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기’입니다. 불교에서는 심지어 108배의 절을 하면서, 그 고통을 감내하여 자신의 ‘가치쌓기’를 하려고 하죠. 부모가 암에 걸려서 자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자녀는 ‘기도’라도 하려고 하죠. 그러나 우리는 ‘고쳐달라는 기도’ 보다 ‘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복음을 알아듣고 그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보죠. 그래서 이 제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를 하지 못하고 ‘다락방’으로 들어가서 ‘기도’라는 행위라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매우 잘 이해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순간 ‘아~~ 그렇구나 이럴 때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기도를 해야하는구나~~’에 휩쓸려 버립니다. 이것을 통해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떤 행위도 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거역한 제자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힘쓰더라’는 말 앞에 ‘오로지’라는 단어도 좋은 뜻이 아닙니다. 인본주의 종교인의 눈으로 보는 ‘오로지’는 ‘정말 성실히,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보이겠지만 성령께서 이 ‘오로지’를 넣은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지시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다른 길만 보고’라는 뜻입니다.
문장의 어휘가 주는 느낌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인본주의 종교의 논리와 인과율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오직 성령께 의지하여 복음으로 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왜 이렇게 성령께서 사도행전 1장에서 계속 인간의 행위를 고발하고 책망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은 바로 ‘예수님이 승천한 이 후 부터 성령께서 오시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성령께서 오시기 전의 인간의 상태는 어떠할 수 밖에 없는가?를 계속 들추어 내시는 것이 촛점입니다. 내일 있을 묵상이 바로 그 핵심의 절정입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스스로 일어나 12제자의 빈자리를 뽑자고 하죠. 심지어 제비뽑기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맛디아를 뽑아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맛디아는 이 후 성경에 절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12번째 자리에 바울을 직접 뽑으시죠. 우리는 이 맛디아 사건을 성령강림 사건 바로 직전에 위치시킨 하나님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정말 재미있는 사실은 '기도'라는 행위는 죄를 지은 이후 인간에게 들어온 제도라는 것입니다. 즉, 죄 짓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를 하고 늘 함께 했죠. 특별히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필요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된 이 후에 인간은 기도라는 '행위'를 만들어 내서 종교활동을 시작했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차용하셔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하신 것이죠. 이 메카니즘이 이해가 되셔야 합니다.
이것은 유독 기도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의 형식 조차 그 당시 대부분 인간이 행하였던 '이방 종교 문화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조상 아브라함 조차도 '우상을 만드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죠. 지금 현대에서 과학을 신봉하듯 그 당시에는 각종 우상이 판을 치던 시기였고 인간은 그런 우상을 최선의 노력으로 섬기던 시기였죠.
인간의 똑똑한 머리는 우상을 섬기는 여러 방법들을 수천, 수만 가지 고안해 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들 중 몇가지를 차용하여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조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와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제도의 형식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죠.
천지창조 장체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된 한시적인 공간과 시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멸망이 한 셋트가 되는 것이죠. 그 안에서 인간이 그 복음의 질서에서 벗어나 인간중심, 즉 인본주의 속에서 우상에 대한 제사와 제도들을 만들어 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가져와 복음을 설명하는 본연의 목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구약의 제사와 제도입니다. 이 메카니즘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가 신성화되면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평생을 기도에 바친 바리새인 보다 그 옆에 있던 죄인 새리의 단 한마디 '중얼거림'을 예수님께서 칭찬한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눅18: 11-14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신앙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성령님의 이끄심임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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