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오늘도 베드로 설교의 연속입니다. 계속 말하지만 지금의 글은 베드로의 변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이 이중 메시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실 아직도 복음을 1눈끔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복음에 눈을 뜬 분이라면 이 때의 베드로 보다 더 큰 은혜의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인본주의 종교관 때문에 ‘베드로의 위대함’이라는 누룩이 베드로를 나보다 한참 위에 있는 성인으로 보게 하는 것이죠. 이런 관점을 사도행전을 보면서 깡그리 깨야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큰 강물의 흐름에 우리의 시야를 맡겨야 합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자가 낳은 자 중에'라는 말씀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의 모든 인간이라는 말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예수님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하는 단계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에서는 기적을 통해 확인하는 단계를 뜻하기도 하죠.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입니다. 즉 '인간의 힘에 의해 낳은 자'입니다. 즉, 보고 믿는 단계를 뜻하죠.
베드로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 그러나 더 깊에 들어가면, 이것은 요한과 베드로의 옛자아의 범위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 복잡해지므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그리고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라는 말은 '성경이 완성된 후에' 라는 말로 생각하셔도 됩니다.(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 "내가 다 이루었다." 의 선언을 기억하시죠? ) 이 후로는 성령께서 직접 선택받은 자들을 품에 넣고 견인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체' 즉, 예수님과 '한몸개념'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즉,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란 천국에서 높, 낮이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이시고 나는 지체(EX. 발톱)이므로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쉽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포커스는 바로 '나와 예수님이 한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나고, 내가 곧 예수님이죠.)
베드로는 지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면서 ‘너희도 그 분의 기적을 보았지 않냐? 내 말이 맞지?’의 변명을 통해 자신들의 방언 사건이 술 취한 사건이 아닌 것을 계속 변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22절을 두, 세번 잘 읽어 보세요. 하나님이 정말 예수님의 기적을 보여주려고 그 분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인지! 이런 베드로의 철 없는 말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수준이 기독교의 수준, 즉 나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 기적과 표적을 베푸신 것도 전부 ‘우리의 어리석음(죄)’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을 인생에서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환경이 바로 자녀 양육 입니다. 자녀에게 수 천번 옳은 말을 해도 그것을 잔소리로 듣고 실천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조금씩 알아가게 되죠.
하나님은 구약 내내 몇 천년 동안 계속 복음을 말씀하셨죠. 그래도 인간은 못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해도 인간은 못 알아 듣죠. 결국 십자가 사건 전에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갑니다. 이게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기적과 표적을 동원해서라도 복음을 설명하고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복음을 못 알아 들으니 복음이라고 쓰고 형광팬으로 줄을 치고 빨간 색으로 당구장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형광팬과 빨간팬의 자국이 신기해서 다시 거기에만 매몰되죠. 이것이 성령님께서 이끄시지 않을 때 인간에게 벌어지는 신앙 형태입니다. 베드로도 지금 이 형광팬과 빨간팬(기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형광팬과 빨간팬이 가리키는 ‘복음’을 보고 있으므로 그 은혜가 어떠한지 알겠죠?
그 다음 23절과 2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의 시각으로 제가 다시 풀어보면 ‘거봐~ 이렇게 기적과 표적까지 행한 분을 너희가 죽였지? 그런데 그 분이 죽은 것은 너희가 제일 겁내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어때 겁나지? 그런데 그 분이 다시 살아 나셨다. 이제는 어떻게 할래? ’ 이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치기어린 베드로의 말을 성령께서 이용하셔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철저하게 계획된 복음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죽인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법 없는 자의 손을 빌려’라고 되어 있죠. ‘죄인인 나’를 성령께서 특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하시죠. 예수님은 곧 ‘나’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인자 예수님’이라고 계속 이야기 하죠. 그 이유는 예수님이 ‘나’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란 1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모든 예수님의 신부를 이야기하죠. 즉, 교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각 각의 신부들에 대입해서 ‘인자’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 예수님은 ‘나’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나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 대신 모든 율법을 이루었으며, 거듭난 나, 즉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어려운 개념으로 말씀드리면,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 때 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영적인 세상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 이런 메카니즘이 가능한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2천년전의 예수님이 지금의 나로 오셔서 나를 고난 속에 넣으시고 그 고난 속에서 인본주의 가치관을 모두 잃게 만드시고 마음이 가난하게 만드시고 애통하게 만드셔서 오직 예수님의 위로(십자가)만 소망하게 만들어서 나를 예수님의 지체로 만드시는 것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또한 이것은 태초에 이미 천국이 완성이 되었고 이미 나는 천국 백성이므로 그 곳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관객의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즉, 태초,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설명이 예수님과 나의 한몸 개념으로 설명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는 천국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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