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늘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령강림’ 에피소드입니다. 특히 ‘방언’에 대한 현상(?)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기독교가 무당집이 되어 버렸죠. 하나님이 말씀하려는 초점을 놓치면 인간이 얼마나 ‘자기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럼 하나 하나 묵상을 시작해 보죠.
‘오순절’은 안식일의 안식일이라고 칭하는 칠칠절(7*7)을 말합니다. ‘안식’이라는 뜻은 ‘노는날, 쉬는날’이 아니라 인간은 구원에 관해서 그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완성하셨다는 것이 촛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하여 모든 것을 스스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하죠.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은 바로 예수님의 품 속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더 간결하게 말하면, 안식일 자체가 예수님의 속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닙니다. 일요일을 성스러운 날로 바꾸어서 주일성수로 지키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성스러운 것은 예수님 뿐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켜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의 정체는 예수님입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은 날입니다. 모세를 통해 인간에게 처음 말씀(은혜)이 내려온 날이죠. 이것과 완벽하게 같은 의미가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의 날입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가지고 내려온 날이죠. 성령께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내려온 날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의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스토리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복음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될 말씀의 초점은 ‘복음’에 대한 성령님의 설명입니다. (이 초점을 벗어나시면 안됩니다. 선물의 내용에 집중하십시오. 선물의 포장지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면 심판받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라고 하시죠. 구약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로 표현이 되면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장면 하나 하나에 ‘드라마적 요소’를 부여하여 인본주의 해석으로 진행하시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속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급하다’는 것은 복음의 속성 중에 ‘긴박성’을 뜻합니다. 즉, 구원은 시급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복음의 속성을 뜻합니다. 또한 ‘강한’이라는 뜻은 구원을 이루실 때 강력한 힘과 능력으로 이루실 것을 말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 은혜를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이죠. ‘바람’은 구원의 시작과 끝, 즉 출발과 방향을 우리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직 구원은 성령께서 이끌어가시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에서 ‘혀’는 말씀을 뜻합니다. 즉, 복음은 오직 말씀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불’의 속성은 청결, 정결, 순결, 성결입니다. 불순물을 태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불순물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정결(성결)이란 우리를 변화시켜서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절대 순결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실체를 알게 되어 그것과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뜻을 히브리 사전에서 찾으면 ‘분리하다. 구분하다.’로 되어 있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혀가 ‘갈라지는 것(구분하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구원에 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매우 긴박하고 강력하게 진행하시는데 오직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인본주의로 부터 분리하여 성령께서 직접 강림하여 가르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가시죠? 이후 나오는 에피소드는 ‘그럼 이렇게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핵심입니다.
교회에 가면 매일 ‘성령충만’을 받으라는데, 도대체 성령충만이 무엇일까? 그것을 설명한 것이 바로 ‘방언’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방언받기’라는 무당수준의 기독교는 버리시고 이제부터 참 성령충만에 관한 것을 묵상해 보죠.
왜 이런 ‘방언받는 에피소드’를 성경에 등장시켰을까요? 바로 복음의 특별한 속성 때문입니다. 방언이란 ‘특정 지역의 소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도행전2장에서 ‘외국어 방언’을 이용해서 방언의 속성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면 그 나라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오직 천국에 속한 자들만 알아듣게 되는데 만약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이것을 알아듣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주셨는데 이 말씀의 겉모습은 누구나 해석과 이해가 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진짜 본질인 복음은 그 안에 감추어 놓으셨죠.
그래서 그 말씀의 겉 포장지를 벗겨내고 진리를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만 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인간은 말씀을 오직 인본주의 종교로 해석할 수 밖에 없게 되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대하면 대학교 교수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나쁜 놈이라도 사랑하는 노력을 해야겠군~~’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의 겉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선택한 자들에게 임하시면 이 말씀의 본질을 드러내시죠. 이 부분에 대한 성령의 가르침을 묵상 속의 묵상으로 풀어 볼까요?
((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원수를 사랑하도록 시키시지만 우리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1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낙심(마음이 가난해짐)하고 애통하게 되죠. 그런데 이것을 모두 다 지켜내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죠. 그런데 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것을 알려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그들의 공로없이 이 ‘원수를 사랑함’을 완성한 예수님의 공로를 공짜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복된 소식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되고 보니, 그 원수가 바로 나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즉, 나는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은 그런 원수인 나를 구원하신 메카니즘이 바로 ‘복음’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을 통해 알게 된 것이죠. --- 이 메카니즘을 성경 66권 내내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냥 나쁜 원수라도 사랑하는 노력을 하자." 의 종교 행위와 많이 다르죠? ))
이 이중괄호의 내용은 복음, 즉 예수님 십자가의 천만분의 1도 안 되는 은혜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본질을 보지 못하고 오직 그 말씀의 겉 표면만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우리는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 처럼, 인생에서 복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배우게 됩니다. )
성령께서는 성경 기록을 통해 한시적으로, ‘방언’이라는 에피소드를 통해 ‘진짜 말씀 속의 복음은 오직 천국 백성만 알아듣는다.’는 속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그 성경을 보완하기 위한 어떠한 기적적인 현상도 단언컨데 없습니다. 성경 그 자체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죽으셨던 예수님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이죠. 그런데 성령충만 받지 못한 인본주의 종교인들이 '답답'하기 때문에 각종 기적, 방언 등으로 믿음을 보충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방언팔이’를 하고 있죠. 새벽마다 랄랄라, 나브라켈로바(이것을 또 초급방언, 중급방언으로 가르칩니다.) 등을 외치며 정확하게 ‘중언부언’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코미디를 연출하죠.
정말 웃기지 않나요? 예수님이 직접 언급한 '너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를 정확하게 따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이!!!
(방언에 관한 묵상은 본 묵상의 ‘특별묵상 카테고리’에 별도로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또한 믿음, 기도, 술, 안식일 등등에 관한 특별 묵상도 같이 있으니 시간 되시면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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