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오늘도 베드로의 변명의 계속입니다. 베드로는 전 전 묵상에서 요엘의 말씀을 가지고 변명을 했죠. 그리고 오늘 다시 다윗의 말씀을 가지고 변명을 계속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요엘과 다윗을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이 가장 꼼짝하지 못하는 인물(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변명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죠.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베드로의 변명을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 제가 자꾸 더 이런 방식으로 말씀 해석을 이끄는 이유는 '방향성' 때문입니다. )
‘다윗이 그를 가리켜’에서 그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복음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이전에도 계셨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십자가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 때의 예수님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어렵죠?
그래서 여기에 매우 매우 중요한 복음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묶여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부분이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고 복음에서 마지막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상하면서 그것에 집중하고 지극정성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인간이 만든 기독교 종교 생활일 뿐입니다.
참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절대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신’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와 그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신 성령님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야 비로서 ‘복음’을 보게 되어 깨어 있는 자, 즉 거듭난 자,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죠.
그래서 다윗의 시대에도 다윗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인 하나님 은혜의 실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내 앞에 계신 주’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죠. 만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신' 그 자체가 오직 구원의 도구라면, 그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논리에 맞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연히 구원받은 인물이죠. 그리고 그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최종적 영적 실체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결국 '상징(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는 마지막이자 온전하고도 가장 큰 상징입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희생, 긍휼, 사랑'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낸 상징, 즉 '대 십자가 에피소드'를 펼치신 것이죠. 다윗은 바로 이 예수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은혜, 희생, 긍휼, 사랑을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읍조린 것이 '다윗의 시편들'이죠. 이런 하나님의 은혜, 희생, 긍휼, 사랑을 우리의 방향에서 보면 '복음(복된소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예수님과 함께 있는 다윗은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한다.’ 성령께서 이렇게 너무나 구체적으로 '과거에도 예수님이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표면에 머무르는 신앙'에서 벗어나서 그 십자가의 정체성에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상하면서 손 비비는 신앙은 불교에서 불상을 상상하면서 절하는 신앙과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대주제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대주제가 가리키는 본질을 보지 못하면 맹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분리된 이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 알아야 하며 이 비참한 상태를 깨어 있는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때서야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이 풀리게 되죠.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이 전부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계시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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