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늘의 말씀은 전일 묵상했던 말씀을 조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일 묵상했던 26-27절에 보면 다윗이 ‘(다윗의) 육체도 희망이 있어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나옵니다. 특히 28절에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다.’라고 결정짓죠.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오늘 말씀인 29절에서 베드로는 다윗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죠. ‘담대히’라는 말을 영어성경에서 보면 ‘확실히’라는 말로 나옵니다. ‘확실히 죽었다’ 입니다 심지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다고 말하면서 더욱 ‘다윗의 확실한 죽음’을 강조합니다 .
그런데 31절을 잘 보세요. (오늘 묵상이 조금 어렵습니다.) “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 라고 되어 있죠. 27절과 31절이 오버랩 되면서 그 메시지가 보이시나요? 성경 번역이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이것을 조금 각색하여 말씀드려 볼께요.
27절은 ‘ 내(다윗)가 죽지 않게 되었다.’이고 31절은 ‘예수님이 죽지 않게 되었다.’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29절은 ‘다윗은 확실히, 분명히 죽었다.’입니다. 이 메시지가 오버랩 되면서 메시지가 보여야 합니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번 성경구절을 옮겨 볼께요.
“27절 이는 내(다윗)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31절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예수)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제 조금 보이시죠? 다윗은 분명히(확실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표현을 하죠. 이제 조금 보이시죠? 그렇습니다. 바로 다윗은 그가 예수님과 한 몸(지체)이라는 것을 인식(믿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몸 원리’는 복음의 속성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속성입니다.
즉, 다윗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되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 ‘한 몸 원리’는 매우 매우 중요한 복음의 속성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가 되지 못하고 종교에 묶여 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맹인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 맞습니다. 율법을 포함한 그 어떤 말씀도 다 나에게 주신 것이며 나는 그것을 다 지켜내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씀을 단 한 줄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 알게 되죠. 그래서 ‘나’로 오신 ‘인자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지켜내시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나의 죄'의 댓가를 십자가로 다 치루셨죠.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못하니까 예수님이 대신 해주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감사해서 그 분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예수님을 따라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오늘은 복음의 핵심에 대한 부분이라 그 깊이가 너무 깊어서 조금 어렵군요)
오늘의 말씀을 조금 과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시간과 공간이 없는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도 결국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죠. 그런데 복음은 이것 보다 높은 개념입니다. 다윗과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의 차이가 매우 크죠. 그러나 오늘 34절에서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시죠. 처음의 주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 주’라는 분이 한 분 더 등장하죠. 이 분이 예수님입니다. 즉, 다윗은 그 시대에 예수님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동시공존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첫 파트에서 묵상한 내용대로 다윗은 자기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을확신했죠.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죠. 즉 다윗의 공간과 예수님의 공간, 즉 다윗의 육체와 예수님의 육체가 하나라는 것을 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너무 어렵지만 복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풀어진 예수님과의 한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그 어떤 신’이 나를 위해 ‘매우 힘든 과정’를 치루어 냈다는 것에 머무르게 되죠. 그래서 그 분을 존경하고 섬기는 ‘종교’가 되고 말죠. 흡사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이고 ‘본질’입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면 비로서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을 읽으실 때 이 ‘예수’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나의 부활'을 하나님께서 설명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나는 AD 2천년 후에 이것을 알게 된 것이고 다윗은 BC 1천년 전에 이것을 알았던 자죠. 시간을 넘어, 공간(육체)를 넘어 예수님과 나는 한 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 한 몸이 된 지체는 '나' 혼자가 아니죠. 많은 '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나'의 다른 표현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보이게 되면, 성경에서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어 좌, 우로 돌이 이어져 집이 지어진다는 것, 천국은 많은 예수님 소유의 보석(나)으로 되어 있다는 것, 오늘 30절 ‘다윗의 자손이 오히려 다윗의 위에 앉게 된다’는 것,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하와가 하필 아담의 속(갈비뼈)에서 나와서 탄생되었다는 것 등등이 전부 한 번에 이해의 물결로 다가 오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눈이 범죄하면 빼 버리라’, ‘오리를 가달라고 하면 십리를 가라’ 등등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다 지켜내셨지만 '나’도 예수님 안에서 그것을 지켰다고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언제 그 모든 것을 다 지키셨냐구요? 십자가에서 그것을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설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이 죽으셨지! 오른눈은 안 뺐잖습니까? 라는 바보같은 질문을 하는 분은 없겠죠? )
그래서 33절의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실현된 ‘성령 강림’ 사건을 특정해서 말씀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 쯤 되면 눈치를 채셔야 합니다. 성령 강림은 이 때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하시고 계십니다. 즉,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은 전 역사적으로 성령께서 계속 일하시고 있는 것을 대표하여 설명하는 표지판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35절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이제 성경이 더 헤깔리시죠? 여기서 ‘네’는 예수님이면서 나입니다. 그리고 원수도 ‘나’입니다. (아~~~ 어렵다~~~ 그쵸? 그래서 복음은 이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계가 분명히 오죠. 눈을 떠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것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관계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오른 편(옳은 관계)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하죠.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 편(옳은 관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된 개념’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원수를 발 아래 심판하실 때 까지 하나님과의 관계과 회복된 상태로 앉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원수는 바로 ‘나’입니다. 정확하게는 ‘나의 옛자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의 옛자아가 완벽하게 심판받을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의 옛자아가 거듭난 나와 완벽하게 분리될 때 까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때 까지 ‘거듭난 나’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보호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눈동자같이 지켜주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이고 우리는 그 결과를 누리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목한 그 분의 신부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맹인에게 빨간색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빨간색을 보게 하는 것이죠. 빨간색을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 저것이구나’가 끝이죠. 그래서 복음은 눈을 뜨게 되면 매우 쉽습니다. 원래 맹인에게 빨간색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편법을 쓰죠. 손을 대보고 촉촉하면 빨간색, 따듯하면 초록색 이런 식으로 맹인의 잣대로 가르치죠. 맹인의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눈을 뜬 자들에게는 완벽한 모순일 뿐이죠.
인본주의 논리(맹인의 잣대)로 성경을 가르치면 일순 논리적이고 인과율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듣는 자들도 인본주의(맹인)에 묶여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죠. ( 돈을 하나님께 드린다?? 내가 봉사(일)를 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돕는다?? 기도를 많이 해서 쌓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일요일을 꽉 붙잡고 성스럽게 지켜야 산다?? 믿음을 가지고 저 산을 명하면 바다로 옮겨진다?? -- 이것들은 전부 본질을 모른채 '알량한 인과율 설교'에 의지하여 종교활동을 하고 있는 어떤 자들의 신앙생활이라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선택받은 자들은 이 논리에서 늘 모순을 느끼죠.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갑갑하고 모순되고 뭔가 놓치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심지어 교회 출석을 포기하기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죠. 그러나 그런 분들이 어느 날 참 복음을 만나면 그 동안 모순된 모든 것이 한번에 풀리면서 완벽하게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 오죠.
오직 예수님의 옷자락에 매달려 ‘눈을 뜨게 해달라’고 늘 가슴에 품고 다니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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