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의 관점으로 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려’라고 반성하는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오늘의 말씀이 시작하죠. 이것을 베드로의 명설교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더 잔인하게 말하면 41절의 3천명이 전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가 3천이 아니라 신도의 수가 3천일 뿐입니다. )
이 3천명이라는 단어가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 사용될 수 있다고 성령께서 판단하셔서 성경에 기록된 것일 뿐입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 에피소드를 이끌어가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그 분이 이 에피소드를 이끌어 가시는 이유는 바로 ‘성경에 기재하기 하기 위함’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죠.
사도행전이 너무 어렵죠? 그래서 복음서 다음에 위치해 놓으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완벽하게 복음에 눈을 뜬 자들만이 사도행전을 오해 없이 볼 수 있도록 해 놓으셨죠. 또한 이 사도행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더 어려운 서신서들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 더 난해한 계시록이 이해가 되죠. 산 넘어 산이죠? 그러나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쉽게 보입니다.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되어있죠. 정말 그럴까요? 턱도 없는 말이죠. 너무나 부족한 말입니다. 복음의 깊이는 이것을 훨씬 상회하죠. 그런데 이 말이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 갭 차이를 설명한 것이 바로 ‘베드로가 이르되’입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복음을 잘 설명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복음의 1/100도 설명하지 못하죠. 그래서 이 말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이르되’라고 들어야 합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여러분 보다 수준이 낮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오히려 성경이 완성된 지금 여러분에게 포커스를 더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제가 지금 포스팅하고 있는 이 묵상도 이것이 전부인 것 마냥 믿고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이 묵상도 복음을 가리키는 수많은 표지판 중 일부일 뿐입니다. 또한 성경의 어떤 한 구절에 매몰되어 ‘부적’처럼 그것을 외우고 다니면서 위로나 받는 식의 종교에서도 멀어져야 합니다. ))
성경에서 나오는 ‘회개’란 반성과는 다른 말입니다. 교회 수련회에서 울고 불고 하면서 부모님께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조금 착해진 모습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심지어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것이죠. 회개의 정확한 의미는 '인본주의에서 돌이켜 복음에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반성은 인본주의의 낮은 행위에서 인본주의의 높은 행위로 옮겨지는 것을 말하죠. -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매우 높은 복음의 진리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눈을 뜨거라’라고 명령하셔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신 기적이 바로 ‘눈뜨기’입니다. 총 7번 하셨죠. 그 어떤 기적보다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왜 7번이나 반복하셔서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셨는지 이제 아시겠죠?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상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내 속에 있는 모든 가치가 무너지죠. 왜냐하면 내 안의 모든 가치는 인본주의에 의해서 쌓아진 것이거나 인본주의 꼭대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쌓았던 가치가 다 없어진 상태 혹은 인본주의 목표를 상실한 마음의 상태를 '마음이 가난한 상태'라고 하죠. 그런 자들은 애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서야 비로서 예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선물이 되는 것이죠.
39절 이런 성령님의 선물은 인간이 원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확정합니다.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죠.
41절 보죠. ‘이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도 매우 깊게 보셔야 합니다. 만약 이 구절로 그 당시 사람들을 구원받은 자들로 만드시려면 ‘이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매’라고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라고 되어 있죠. 즉, 그냥 종교적 현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적 현상을 성령께서 이용하셔서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즉, 이 때 이 사람들과 상관없이 실제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경로는 바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받아서 그 안의 복음을 알게 되어 옛자아는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된다’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 제가 자꾸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 당시 상황과 에피소드에 매몰되어 그것을 진리로 받으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성령님의 의도를 진리로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 안에 복음의 비밀을 숨긴 것 처럼 성령께서는 사도행전에서 에피소드 안에 복음의 비밀을 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드리면, 현대 시대에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 몇 방울 머리에 끼얹는다고 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시겠죠?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당시에는 특별했을 것이다.'라는 관점을 가진 순간 부터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의도가 가려지게 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기적도,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 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 오직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셔야 합니다. ))
성령님을 통해 눈이 떠지게 되면, 세례의 행위가 아닌 '세례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의 본질을 알게 되어 복음, 즉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는 것이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시 살아 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옛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를 뜻합니다. 그리고 옛자아의 죽음이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를 내가 알게 되어 그것과 분리된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을 뜻하고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란 내가 예수님과 한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적으로 예수님의 지체가 된 것을 알게 된 것을 뜻하죠.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기에서도 이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들도 모르고.’ 그 때란 이 세상의 완벽한 종말의 시간을 말하기도 하겠지만 더 진정한 실체는 바로 개인(교회)의 구원(혹은 구원시점)입니다. 그래서 신도의 수가 3천이나 된 현상은 복음을 설명하는 표지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3천’에서 3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숫자로, 복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1,000(천)은 완벽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전반부의 사람들의 나이가 935 965 922 9땡땡.... 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즉, 너희는 이 땅에서 완벽(1,000)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경을 읽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 당시 그들을 9땡땡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9땡땡이 나오죠? 하나님의 반복은 '중요한 것'이라고 했죠! -완벽하게 살기, 잘 살기를 포기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으로 바꾸세요. ) 그래서 이 3천이라는 단어의 뜻은 ‘지금 완벽한(천) 복음(3)의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있단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3천의 신도가 더해진 것은 구약의 모세의 십계명 사건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와서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그 벌로 3천명이 죽은 사건과 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말씀(율법)으로 인간은 완벽하게 죽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으로 인간은 완벽하게 살아난다.’입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율법을 받은 날과 신약에서 성령님이 내려 온 날이 같은 오순절이라는 것도 초점이죠.
이렇게 몇 천년을 간격으로 수십명이 집필한 성경이 통일성 있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천지창조 자체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눈을 뜨고 보면 나의 모든 인생이 전부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게 되죠.
성경에서 보면 꿈을 통해 계시를 받는 장면이 자주 나오죠. 그리고 우리도 매일 잠을 자면서 꿈을 꾸죠. '왜 꿈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꿈을 깨면 현실을 대면하고, 현실을 대면하면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유는 바로 우리 인생이 '꿈'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실체인 '영적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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