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2:42-47(22.05.23.월)

은혜바라기 2022. 5. 23. 08:23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의 말씀도 사도행전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시려고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의 기준, 즉 인본주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똑 같은 ‘구름’을 바라보더라도 기상학자와 화가가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다르겠죠. 

 대부분의 교인들이 오늘의 말씀을 통해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자’를 목표삼아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말씀을 기록해 놓은 목적은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을 목표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초대교회의 모습은 성령께서 간섭하셔서 잠시 만들어 놓은 ‘구름의 모습’입니다. 만약 이것이 성령께서 의도하는 이 땅의 교회의 목표였다면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든 교회는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절대 실패하실 리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땅도 멸망이 예언되어 있지 않아야 하겠죠.)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는 그 당시 잠시 간섭하셔서 교회의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내신 것일까요? 당연히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하나 하나 알아 보겠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로 오늘의 말씀이 시작하죠. 사도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역할을 일부 맡은 자들이라고 했고 그 자들을 사용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로 시작했다는 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간섭하셔서’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42절은 보죠. ‘서로 교제하고’란 예수님의 지체됨 혹은 한몸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떡을 떼며’란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두 문장을 합치면, 예수님의 지체(한몸)가 되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그 분과의 대화에 힘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사도행전의 관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므로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는 문장은 이런 모습의 교회를 목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율법주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모습이 되려는 것을 무시해라(영지주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죠? 

 이렇게 잠시 교회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신 성령께서 그것을 통해 복음의 속성을 가르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현대의 어떤 교회가 매우 매우 노력을 해서 초대교회와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해도 성령님의 의도를 전부 다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매일 싸움과 다툼만 일어나도 그 안에서 ‘복음’을 알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 싸움과 다툼 또한 성령님의 의도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잘 이해하시면서 사도행전을 따라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절 43절에 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데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난다”고 되어있죠. 이 부분이 정확하게 성령께서 교회에 직접 관여하셔서 이 장면을 만드시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기사와 표적’이라는 도구를 굳이 쓰시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내가 복음을 설명하려고 굳이 간섭 중이다.’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복음이 들리는 분들에게는 성령님은 매우 자상한 분이시죠. 

 오늘의 묵상의 초점은 어떤 안경을 쓰고 말씀을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관점의 문제입니다. 조금만 본질은 놓치면 바로 인본주의 종교로 돌아가게 되므로 매우 집중하셔야 합니다. 

 44절을 보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라고 되어 있죠. 이제 이 구절이 ‘자~~~ 이제 교회에 등록했으니 초대교회와 같이 너희들 물건을 서로 서로 나누어 쓰고 불쌍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고 부자는 더 많이 내어 놓아라~~~’ 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죠. 이 말씀도 복음의 ‘한몸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몸속성은 성도들간의 원리라기 보다는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분의 모든 것을 나와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모든 것은 ‘천국’ 혹은 ‘복음’ 혹은 ‘성령’을 가리키죠. 

 45절을 보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며’라고 되어 있죠. 즉, 예수님의 모든 것, 즉 십자가에서 그 분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구원)에 따라 나줘 준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온 ‘재산’의 개념은 전부 ‘천국’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이렇게 창조된 세상에 ‘부유한 자’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런 삶을 좋아하고 추구하죠. 하나님이 이런 시스템을 허락하신 이유는 바로 ‘천국’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즉, 눈에 안보이고 무한한 영적 개념인 천국을 인간은 절대 이해 못 합니다. (정확하게는 천국은 관계의 개념이고 이 개념으로 들어가면 더 더욱 이해를 못합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 천국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필요하신 것이고 이 표지판의 하나로 ‘부유함, 부자’의 시스템을 허락하신 것이죠. 이것을 통해 인간은 ‘아~~~ 이런 부유하고 풍성한 삶은 좋구나~~ 그런데 이것보다 몇 천배 더 풍성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곳' 을 생각하며 묵상하게 되죠. 천국의 표지판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욥기서의 맨 마지막 장을 보면 욥은 전보다 곱절의 재산을 받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죠. 이 때 곱절의 재산이 바로 ‘천국’ 즉 ‘복음’을 가리킵니다. 즉, 인생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되어 천국을 얻게 된 것을 영적으로는 절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곱절의 재산’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 노력해서 돈이 아무리 많아져도 내가 원하던 천국같은 삶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죠. 즉, 돈이 없을 때 돈을 그리워하지만 그 돈이 많아지면 그것도 행복의 실체, 천국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의도죠. 이것을 통해 다른 영적인 천국을 묵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복음의 안경을 쓰면, 45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팔아 우리에게 천국을 나누어 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46-47절처럼 천국의 삶이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천국의 가리키고 이 후의 성도들의 모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천국의 모습으로 성령께서 표현하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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