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왜 꼭 이 사람들의 하나님이어야 할까?' 물론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 세 사람을 가장 휼륭한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 앞에 하나님을 놓아서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려는 의도였겠죠.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베드로의 인본주의적 종교 언행을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어떤 복음의 어떤 속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전부 이런 식의 해석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방향성을 잃지 마시고 집중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혹은 ‘이 표지판이 가리키는 예수님’ 혹은 ‘이 표지판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보여 주셨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도 유대인이라는 셈플로 복음을 설명하셨던 하나님으로 해석을 하셔야 합니다.
유대인은 ‘선민(선택된 민족)’이 맞습니다. 그런데 선민주의로 빠지게 되면 복음에서 벗어나게 되죠. 포도 한 송이가 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 포도를 살까? 말까? 망설일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그 포도 한 송이에서 한 알갱이를 선택하여 먹어보는 것입니다. 그 한 알갱이는 전체 한 송이를 위한 셈플일 뿐이죠.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정체성입니다. (물론 그들은 부인하겠지요.) 진짜 선택된 것은 그 한 알갱이가 아닌 한 송이입니다. 그 한 송이를 ‘교회’라고 하죠. 이렇게 포도는 복음을 설명하기 매우 좋은 과일이기 때문에 성경에 포도나무가 매우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바로 십자가의 완성과 부활을 뜻합니다. 여러분들은 영화(영광)의 뜻을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드리는 것을 어떤 신을 높은 곳에 모셔 놓고 두 손 들어 지극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죠. 그러나 이것 또한 인본주의 종교에서 만들어 놓은 것 뿐입니다. 즉, 인간(나)이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을 역지사지의 관점으로 극대화 시켜서 ‘신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한 것이죠. 그래서 이런 장면은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그러나 참 기독교에서 ‘영광’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극정성을 통해 영광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죠. 그 창조의 중심과 완성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영광이란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완벽하게 다 이루어졌다는 것의 표현입니다. (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고 성령님께서 견인하여 가는 것입니다. 즉, 영광은 하나님 홀로 이루신 것입니다. )
조금 쉽게 예를 들면, 어떤 학생이 일요일 아침 6시에 도서관에 가서 저녁 12시까지 ‘책 3권 전부 외우기’라는 목표를 세웠다고 해 보죠. 그리고 그 날 저녁 12시에 이것을 완벽하게 끝냈다고 해보죠. 이 학생이 12시에 도서관을 나오면서 뭐라고 외칠 수 있을까요? ‘난 휼륭했어~~’ ‘오늘 괜찮았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겠죠. 이것이 바로 ‘영광’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개념은 정확하게 복음의 완성을 뜻합니다. 즉, ‘나(인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어입니다. 내 공로, 내 지극정성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죠. 그런데 이런 복음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구절이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인간,교회)는 뭔가?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가?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반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복음의 완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이 방향성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가 아니고 반대로 영광을 가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즉, 복음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일 뿐이죠.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13절 중반부터 ‘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려주기 시작하죠. ( 연예인들이 시상식 때 이 영광(상)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거야 말로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코미디일 뿐입니다. )
‘너희가 그(예수)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셨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입니다.
이 말씀에서 나온 ‘살인한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나의 옛 사람이죠. 즉, 나는 생명의 주 예수님을 죽인 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나의 건강, 재산, 자식’을 위해 기도할 때 마다 우리는 나의 옛자아를 선택하고 생명되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죠. 아직도 이 메커니즘이 이해가 안 가신다면 복음에 눈이 더 떠져야 하는 분이십니다. (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빌라도’는 단지 도구입니다. 절대 의미를 두면 안됩니다. ‘빌라도’라는 이름의 뜻은 ‘창이라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즉, 이 도구를 사용한 사용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죠.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울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라고 되어 있죠. 사도신경 자체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신경 자체를 너무 맹신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렇게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라는 부분은 ‘내가 휘두른 창으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사’라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복음의 첫 단계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죄인이라고 하죠. 우리는 생명(예수님)을 보면 박해를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입니다. 이런 나를 완벽하게 자각하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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