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3:1-10(22.05.24.화)

은혜바라기 2022. 5. 24. 08:4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9시면 오후3시입니다. 전에 말씀드렸죠. 성경의 시간을 계산하는 법 ( 유대인은 태양 빛(예수)이 뜨는 아침 6시를 시작 시간으로 보고 0시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6을 더하면 됩니다. 9+6=15시(오후3시)) 이 9시를 복음으로 해석을 한다면 ‘아직 빛이 있는 시간에~~’ 라는 뜻으로 ‘이제 나오는 에피소드는 복음으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죠. 2는 증거의 숫자입니다. 즉, 성령께서 두 사도를 통해 복음에 관하여 확실하게 증명(설명)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2절에서 구걸하는 장면을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2절은 정확하게 인본주의에 묶여 사는 나를 표현한 구절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란 ‘길’이신 예수님과 분리된 채 죄인으로 태어난 나를 뜻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하는 자를 가리키죠. 또한 이 자를 ‘구걸하는 자’로 표현하고 있죠. 나의 인생은 오직 인본주의 목표를 구걸하는 인본주의 포로의 인생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부유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인본주의에서는 성실한 삶이라고 칭송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구걸하는 삶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문(아름다운 문)’이라는 것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즉,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부유한 삶은 매우 아름다운 자리로 보여지죠. 그 자리에 오르고 지키려고 인간은 항상 그 자리를 맴돌죠. 그래서 하나님은 매우 짓궂게 ‘미문’ 과 ‘구걸’을 한 구절에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일종의 블랙 코미디 같은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슬프게 비웃고 계시는지 아시겠죠? 

 그런데 이렇게 못 걷고 구걸하던 자가 걷게 됩니다. 바로 3절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자가 찾아 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이 자 쪽으로 오게 된 것이죠. 즉, 성령께서 이 자를 찾아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못 걷고 구걸하던 자는 성령님을 만나도 ‘무엇을 얻을까?’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죠. (5절) 이 장면이 바로 ‘지금의 교회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이때 6절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하죠. 즉,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바라는 이 세상의 것, 즉 자녀 잘되기,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잘살기, 건강 되찾기, 교회 성도 늘리기 등등 이 세상의 모든 바램(금과 은)은 성령님의 관심 밖(내게 없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단 1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으시죠. 이 6절 하반부가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을 '죽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죽은 자' 를 살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시죠. 우리가 복음에 눈 뜨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죽은 자'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복음을 설명하는 것 외에는 모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많은 교인들이 이것을 부인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애국하고, 효도하고, 남을 돕는 착한 사람들의 인생도 많다. '그런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바로 '노아의 방주'사건입니다. 성경 과학자들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 당시의 인구 수가 지금의 인구 수(70-80억)와 비슷하다고 하더라구요. 즉, 노아의 방주 시대에도 애국하던 자, 효도하던 자, 남을 돕는 자들이 많이 존재하였겠죠. 그러나 다 차별없이 죽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 시대에 모든 사람들 다 죽이신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인생이 가치 있는가? 이 답변을 위한 것'입니다. 즉, '모든 인생의 의미 없음' 입니다. 복음의 눈을 뜨신 분들은 이 부분에서 이마를 탁~ 치며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마 24:38-39상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

 

 '죄를 지으면서 홍수가 나서~~'라고 표현이 되어 있지 않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라고 표현이 되어 있죠. 그냥 우리의 인생 전부를 말한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을 하나님은 이런 시각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 즉 복음을 듣고 우리가 '죽은 자'임을 알게 되어 오직 살아계신 자, 즉 예수님만 소망하여 그 분의 지체가 되어 다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이후 7절-8절을 보면, 그 못 걷던 사람이 걷게 되고 뛰게 되면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확하게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어 성전(천국의 표지판)에서 하나님과 관계 회복(하나님을 찬양)되는 장면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즉, 구원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의 오른 손(올바른 관계의 회복 : 구원)을 잡아서 일으키는 것입니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라고 되어 있죠. 복음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서서 걷고 뛰죠’ 즉, 복음의 길을 매우 강하고 빠르게 걷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나오죠. 즉, 천국의 삶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완벽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9-10절은 이 사람을 본 다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이 자를 보고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되어 있죠. 이것이 바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알게 된 사람을 볼 때의 태도입니다. 복음에 눈을 뜨게 되어 인본주의 종교관에서 벗어나 생명의 말씀을 알게 되면 그 앎으로 인하여 기존의 교인들과 신앙적이 대화가 잘 안 될 것입니다. 갈등이 생기죠. 여러분들이 복음을 소개하면 그들은 놀라죠.(대부분 부정적인 놀람이죠)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람의 생각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놀라죠. 하지만 그 중 소수의 사람들은 ‘내가 늘 모순되게 생각했던 것들을 이 사람이 하는 말에 들어 있다.’라고 생각하면 같이 묵상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도 곧 같이 길에서 서고, 걷고, 뛰게 되죠. 놀랍지 않나요? 이런식으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진짜 지체를 하나 둘 씩 찾아내십니다. 

 

  "마13:47-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성령께서 천국 백성을 찾아 내시는 방법이 두 번의 단계를 거치죠. 일단 그물에 담는 것이 첫 단계죠. 모든 교회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 좋은 것을 골라 내는 것(못된 것은 내버리는 것)은 복음을 알아듣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분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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