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3:15-18(22.05.27.금)

은혜바라기 2022. 5. 27. 08:3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우리는 어제 묵상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낱낱이 묵상해 보았죠. 우리는 그냥 ‘죄인’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80년을 살면서 이 ‘죄인’이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교회에서 죄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 뿐이죠. 그러면 ‘난 매우 휼륭한 교인이야. 난 늘 죄인이라고 외칠 수가 있어~~~’ 라는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에 맨붕이 오시는 분들은 바로 성령의 미세한 소리를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흥이 없는 분들은 바로 인본주의 종교에 계속 묶여 있는 분인 것입니다. 이 작은 미세한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날이 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이 구절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의 완성을 뜻하죠. (영광에 대한 의미는 전 묵상에서 길게 다루었으니 참고 하세요.)

 복음은 늘 ‘한몸원리’를 이해 하여야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순간 모든 교회(나)는 부활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우리는 이해가 안 가겠죠. 그러나 이것을 매일 매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죠.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영역은 피조의 영역이죠.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밖으로 선언이 될 때 피조의 시간과 공간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은 이미 선언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복음은 하나님이 계획을 하는 순간 이미 다 이루어 진 것이죠. 더 쉽게 말하면 이미 천국은 완성된 상태입니다. 

 지금의 이 세상은 그 천국이 왜 완성되었고,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시적인 무대로 설명되어지는 것 뿐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저와 제 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보죠. 그런데 제가 먼저 이 세상을 먼저 떠나서  천국에서 눈을 뜰 때 거기에는 이미 제 아들도 와 있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과 나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나를 부인하고’라는 구절이 바로 이 세상의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만을 소망한다.’라는 것을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나의 ‘잘살기’를 위해 ‘예수님이라는 신을 소망한다.’로 이해하죠. 이 차이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이자 기원, 근원입니다. 참 근원을 찾게 되는 것이죠.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의 뜻은 복음이 어떻게 걷지 못했던 사람을 걷게 했는가? 즉 예수님의 이름(정체성)을 알게 된 것이 나를 진리(생명)의 길에 서게 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는 말씀은 매우 깊은 묵상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죠. 그런데 가장 오해가 큰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은 참 믿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감정일 뿐입니다. 참 믿음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존재하죠. 

 그래서 ‘예수님을 믿자’ ‘예수를 믿어 구원 받자’라는 말은 다 틀린 말입니다.  인간이 불교의 불상을 믿을 때 발현되는 그 마음(믿음)과 동일한 마음(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믿음에 대한 정확한 방향성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믿게 된다' 입니다. 그 말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나온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는 구절입니다. (방향성이 다르죠?)

 

 단언컨대 우리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오셔서 알려주시죠. 그때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조금 알게 됩니다. 이 '알게 됨' 즉 ‘앎’을 예수님이 알려 주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가능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마시고, ‘복음에 대하여 이만큼 알게 되었다.’라고 바꾸어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구약을 잠깐 보죠. 

 기근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아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그 아내 사라가 너무 예뻐서 애굽왕이 자신을 죽이고 데려갈까봐 그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왕에게 바치죠. (아브라함은 이정도 밖에 안되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닌 애굽 왕을 혼을 냅니다. 그래서 애굽왕은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 보내죠. 이 당시만 해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던 아브라함은 이때  ‘하나님이 이 세상 최고의 왕인 애굽왕 보다 쎄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죠. 즉,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한 눈끔만큼 '앎'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뜻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강하고 굳센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지리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한 눈끔씩 하나님과 복음을 알아가게 되는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반전이죠?  이제 이런 ‘믿음’을 오해하지 않고 잘 생각하시면서 따라오세요. 

 그래서 16절 후반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는 구절 다음에 1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라는 구절이 붙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 ‘앎’이 문제라는 것을 특정하죠. 이것을 연결하여 조금 더 쉽게 풀면, "너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복음을 알게 되는 ’앎‘이란다." 라는 말입니다. 즉, ‘성령께서 알려주셔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어' 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성경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섭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리죠. 즉, 인간의 행위나 지극정성과 상관없이 오직 복음은 하나님께서 홀로 계획하셔서 그 분께서 미리 선택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1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3:25-26(22.05.31.화)  (0) 2022.05.31
행3:19-24(22.05.30.월)  (0) 2022.05.30
행3:13-15(22.05.26.목)  (0) 2022.05.26
행3:11-12(22.5.25.수)  (0) 2022.05.25
행3:1-10(22.05.24.화)  (0)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