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3:19-24(22.05.30.월)

은혜바라기 2022. 5. 30. 07:42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회개’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보통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목격하는 회개의 모습은 ‘반성’일 뿐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다 존재하고 학교, 가정, 심지어 교도소에서도 많이 볼 수 있죠. 교회 수련회에서 어린 학생들이 울고 불고 짜고 하면서 지난 날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교회 잘 다니고 예수님 더 사랑하고 부모 말씀 더 잘 듣는다고 선언하죠. 그리고 이후 변화된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교사들은 우리 아이들이 회개하고 은혜받았다고 말하죠. 아이들도 교사들도 전부 다 복음과는 다른 방향성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회개’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회개’란 그 본질에 있어서 ‘반성’과는 반대 방향에 있죠. 반성은 내가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즉, 나쁜 내가 착한 나로 변할 수 있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나는 절대 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회개’는 성령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는 절대 변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되는 죽은 자라는 비참함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 ‘회개’입니다. 즉, 반성은 나에서 나로 가는 방향성이지만 회개는 나에게서 예수님께로 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죠. 

 이렇게 진정한 ‘회개’란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 예수님의 지체가 되자, 내가 예수님의 지체라고 오늘 부터 믿을 거야~~’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영적 귓에 대고 ‘넌 예수님의 지체란다.’라고 알려 주시는 것이죠. 이렇게 알려주는 과정이 바로 80년 인생입니다. 

 이것을 조금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식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즉, 세례 또한 이 회개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표지판(그림자)일 뿐입니다.) 또한 이렇게 성령께서 복음을 알려주셔서 알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의 본질은 바로 ‘진리를 알게 됨’입니다. 내가 마음에 집중하여 믿음이라는 감정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외부로부터 내가 몰랐던 참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뜻하죠. 

 그래서 오늘 19절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하는 말을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너무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방향성을 잃어 버리면 사도행전은 전부 다른 길에서 헤매게 됩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반성을 해서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 받자.’의 방향성에 서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예수님이 내리신 죄에 대한 정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틀리죠?

 이 말씀은 ‘회개’와 ‘죄’의 본질을 이해한 자만이 해석이 가능하도록 숨겨 놓으셨습니다. 회개는 죽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이것을 알려주신 성령께서 ‘그러나 너에게 예수님이라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줌(믿음)으로 인해서 나는 예수님만 소망하며 믿게 되죠.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9절의 말쓸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어(믿게 되어) 죄라는 것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 19절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함으라’의 말씀입니다. 간단하지가 않죠? 그래서 인생을 80년이나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돌이켜’라고 굳이 이 단어를 넣으신 이유도 ‘내가 변화하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의 신본주의에서 떨어져 나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내가 복음의 진영으로 돌아 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되어 있죠. 이 말이 바로 복음의 진영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지체,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를 뜻하기도 하죠. 이제 이 19절이 이해가 되시죠? 

 그리고 20절 보면,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20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는 시간적 순서로 보면, 앞뒤 문맥이 잘 맞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의미적 순서로 인식하셔야 합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즉, 19절에서 ‘회개’를 하면 20절에서 ‘그리스도를 보낸다.’는 시간적 순서가 아닙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의미적으로 순서를 배치해 놓으신 것 뿐입니다. 이 부분을 시간적 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영적 의미로는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이 땅에 보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21절 선지자, 22절과 23절 모세 24절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고 하시죠. 여기서 만물이 회복하실 때란 바로 예수님이 그 분의 지체를 다 찾은 때를 말합니다.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1마리의 양을 찾는 개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죠. 10개의 드라크마 중에 읿어버린 1개의 드라크마를 찾는 개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1마리의 양(나)을 온전하게 찾을 때 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시작을 2천년 전에 예수님의 부활 승천 하신 이후부터 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2천년 전에 일어난 이유는 인간은 어차피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받아서 복음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태초에 일어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획함과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이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인 ‘시간’을 기다려서 성공의 여부를 가려야 한다면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이 21절의 시작을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이상하죠? 어떻게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이 존재했을까요? 이것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되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도 안되는 모순’을 던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고민’을 하라고 던져주시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고민의 끝에서 바로 ‘아~~ 예수님께서는 이미 태초부터 계셨고 이미 하나님의 십자가 계획이 태초에 완성이 된 것이구나~~’라는 것까지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22-24절 모세와 사무엘 이야기도 나온 것이죠. 이들이 몇 천년 후의 예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들이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들이 이미 예수님이 태초부터 존재하셨으며 그 분이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성령님께 들은 것일 뿐입니다. 즉, 21절처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이미 완성이 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죠. 

 인본주의 종교의 특징은 ‘하나님’을 인간의 범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 놓고 약간 능력 많은, 즉 ‘슈퍼맨같은 신’으로 생각하죠. 예수님은 시간이라는 피조물에 갖혀 있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본주의 종교는 이런 오해 뿐 아니라 ‘교회에 가면 하나님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나님을 공간에 가둬 두는 인본주의 종교관을 가지고 있고 또는 ‘헌금을 많이 하고 지극정성을 보이면 좋아할 것이다’ 라고 인간의 욕심에 대입하는 인본주의 종교관도 가지고 있죠. 전부 다 ‘꽝’입니다. 

 “행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4:1-4(22.06.02.목)  (0) 2022.06.02
행3:25-26(22.05.31.화)  (0) 2022.05.31
행3:15-18(22.05.27.금)  (0) 2022.05.27
행3:13-15(22.05.26.목)  (0) 2022.05.26
행3:11-12(22.5.25.수)  (0) 20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