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3:11-12(22.5.25.수)

은혜바라기 2022. 5. 25. 07:5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원래는 한번에 묵상을 해야하는데 너무 길어서 부분 부분 끊어서 묵상을 하겠습니다. 

 ‘나은 사람’은 걷지 못하다가 걷게 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적으로 말하며, 예수님이라는 ‘참 길’을 걷지 못했던 내가 성령님(여기서는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도구로 표현)으로 인하여 참 길을 걷게 되는 것, 즉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이 된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라고 표현되어 있죠. 

 이후 모든 백성이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입니다. ‘행각’은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형태의 성전 외부의 방을 뜻합니다. 누구나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서로 토론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곳으로 종종 사용 되었죠.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했죠. 즉, 성령께서 사도라는 인물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이 어떻게 전파가 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계속 ‘나’로 대표되는 인물들이 나오고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된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인물들이 어떻게 만나서 복음을 알아가게 되는지에 대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에 초점을 잘 맞추어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11절에 대한 해석은, 성령님의 일하심(걷게 된 자)을 통해 놀랍게 여기고 고민하게 된 나를 뜻합니다. 즉, 유대인들이 고민하고 토론했던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것은 '내가 복음에 눈을 뜨고 거룩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인본주의 종교의 모순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늘 신앙 안에서 고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왜 내 기도는 응답이 없을까? 왜 십일조를 내는데 100배의 축복이 없을까?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어야 하는가? 등등 그 모든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거룩한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거룩한 고민이 바로 '기도'입니다.)

 ‘솔로몬’이라는 뜻은 샬롬(평강)이라는 뜻입니다. 샬롬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하죠. 그래서 여기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성령께서 기록한 이유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을 사용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진정으로 ‘예수님(샬롬)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라는 의미를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강(샬롬)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대부분 알고 있죠. 그러나 이런 이 세상의 편안함은 ‘참 평강’을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입니다. 평강의 가장 가까운 의미는 바로 ‘묶임(붙잡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죠. 묶여 있는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되면 평강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조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태풍이 몰아치는 밤 바다에 낡은 조각배 한 척이 파도에 휘청 휘청 하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조각배는 자유롭게 풀려 있지만 매우 위험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부 한 사람이 그 조각배를 단단한 바위에 꼭 묶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조각배는 그 때부터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바위를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 평강의 정확한 개념인 '붙잡힘'입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에 '붙잡다.'로 시작해서 '평강(샬롬=솔로몬)'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풍이 몰아치는 밤 바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혹은 인생이라고 생각을 해도 되죠. 또한 조각배는 스스로 묶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부(성령)가 필요한 것이죠. 성경은 이것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성령께서 그들을 놀라게 해서 솔로몬(샬롬) 행각에 묶어 버리죠. 그들은 그 안에서 거룩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되는 것이죠.  물론 성령께서 사용하신 베드로는 도구로써 등장만 할 뿐입니다. 12절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로 시작을 하죠. 

 그래서 베드로는 처음부터  방향성부터 바로 잡아줍니다. ‘왜 놀랍게 생각하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하죠. 이 장면도 잘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올바른 방향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진짜 이 장면이 기록된 이유는 성령께서 지금 이것을 읽고 있는 ‘나’에게 이 장면은 절대 베드로 능력의 관점으로 보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죠. 

 이렇게 시작된 설교로 4장에 가서 5천명의 사람이 믿게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한 파트 한 파트가 모두 ‘성령과 나’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재미있죠? 4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모든 것을 나에게 가르치셨고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는 이 복음이 어떻게 나와 만나는가?를 알려 주시고 이런 복음을 만난 내가 이 세상의 교인으로 살면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서신서를 통해 알게 되죠. 마지막으로 이렇게 복음을 마음에 품은 채 인본주의 세상에 살게 되면서 받게 될 고통과 박해를 미리 예고한 것이 요한 계시록이죠. 공포 영화를 꼭 봐야하는데 그것을 미리 알려 줌으로써 그 두려움을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성경의 모든 초점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복음이 스토리라면 주인공이 예수님이시죠. 그래서 그 분의 필요성을  계속 사전에 이야기한 것이 바로 구약이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전부 합쳐져 ‘성경’이 완성된 것입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베드로의 설교를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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