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4:1-4(22.06.02.목)

은혜바라기 2022. 6. 2. 08:05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드디어 3장에서 베드로의 긴 설교가 끝났습니다. 오늘은 그 설교 후의 현장의 모습입니다. 2절에서 보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말이 바로 ‘복음’이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 한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음을 싫어하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이라고 그 종류를 나열해 놓았습니다. 이 부분을 매우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바로 지금의 교회입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현대의 교회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 맡은 자는 현대의 집사와 성도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종교활동인들을 뜻합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죠. 즉, 오늘 4장1-2절을 통해 성령께서 가르치고 싶으신 것은 바로 교회에 다니는 모든 자들은 절대 복음을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아닌데~~~나는 이렇게 이 글에서 복음을 해석하여 듣고 보니 들을만 하던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죠. 그런데 제 글 조차 복음에 누룩을 섞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절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빵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먹기 힘들 정도의 누룩없는 무교병이 그 속성이자 본질이죠. 아마도 제가 우리 식구들에게 조차 완벽하게 무교병 속성의 복음만을 전달하면 다 듣기싫어서 도망칠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이것이 두려워 적당하게 누룩을 섞는 것이죠.(저 스스로에게도 누룩을 섞어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인간은 이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그것이 나의 뇌에서 표현이 되는 순간부터 누룩이 섞여서 해석이 되어 표출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이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인은 창녀촌에서 뒹굴다가 복음을 듣기도 하죠. 반면 어떤 종교인은 가장 휼륭한 목사의 말씀을 평생 들으면서 완벽한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지옥으로 심판받습니다. 오직 복음은 선택된 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알려 줌‘이 전부입니다. 인간의 노력은 단 1도 없습니다. 

 이렇게 세 종류의 교회 사람들, 즉 모든 교인들은 복음을 듣기 싫어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을 교회의 구석에 쳐박아 넣고 절대 꺼내지 않죠. 그것이 표현된 것이 바로 오늘 3절입니다.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고 되어 있죠. 에피소드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사도들이 잡혔네~~’라고 해석이 되지만 이것을 이용하여 성령께서 복음의 어떤 속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분들은 ‘아~~ 교회에서 복음은 항상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하시는구나~~’를 알게 되죠. 

 특이하게 이 3절에서 ‘날이 저물었으므로’라고 되어 있죠. 이상한 문맥이죠? 날이 어두워서 더 잡아둔다?? 이것을 굳이 성경에 기록을???? 절대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해석을 한다고 해도 ‘밤이니까 피곤해서~~ 업무가 끝나서~~ 내일로 미루었나부다~~’가 끝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밤’은 빛이 없는 시간을 뜻합니다. 빛은 예수님이죠. 즉, 교회가 복음을 싫어하게 되면 교회는 복음을 분리하게 되죠.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하고 이것은 바로 빛이 없는, 즉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잃어 버린 양을 찾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4절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입니다. 즉, 전도는 교회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말씀으로 홀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왜 ‘남자’만 숫자를 셀까요? 이것도 당시 남성 우월 주의이라는 나쁜 관습이죠. 그런데 성령께서 이런 나쁜 관습 조차 성경에 기재하신 이유는 바로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남자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가리키는 예수님은 교회와 하나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 한 분 이라고 칭하면 그 안에 교회도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5천명’에서 5라는 숫자는 모세오경을 뜻하는 말로 ‘말씀’을 뜻합니다. 즉, ‘말씀으로 들어왔다’라는 뜻이죠. 즉,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간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하죠. 이 5천명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진정으로 복음의 진영에 들어 갔을까요? 답은 ‘ 모릅니다.’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책이죠. 즉, 누가의 표현일 뿐입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때 ‘5천명이 믿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참 진리를 알게 되었다’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베드로의 말을 믿었다.’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당시 사람들의 구원에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속성과 전파과정을 알려주시는 것이 촛점입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성령께서 원하시는 사도행전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이런 부분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이 에피소드의 촛점을 다시 한번 요약합니다. 인간의 교회는 항상 복음을 배척하지만 성령께서 홀로 말씀으로 복음의 전파를 이루어 내신다는 것이 촛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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