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소주제는 ‘바보같은 대제사장들’입니다. 성령께서는 너무도 재미있는 방식으로 대제사장들의 바보같은 행위를 계속 고발하고 계시죠. 이 바보같은 대제사장은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하지만 더 넓게는 교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간의 영향력을 뜻하기도 하고 그것은 바로 ‘나’를 가리킵니다.
어제의 묵상을 잠시 꺼내오면, 어제 6절에서 굳이 성령께서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사더를 총출동 시키고 심지어 그 문중을 ’다‘ 참여 시킨 장면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다 참여 시켜서 그 바보같은 행위와 질문을 꼬집고 있는 방향성을 잘 인식하시면서 묵상을 하셔야 합니다.
이 바보같은 자들과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을 대비시켜 놓은 것이 바로 13절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고 되어 있죠. 직전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신학교는 눈먼 똑똑한 맹인들이 ‘빨간 장미’를 어떻게 구분하고 설명할까? 연구하는 것 뿐이라고 말씀드렸죠. ‘빨간 장미’는 그냥 눈을 떠야만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바로 맹인들과 복음에 눈이 뜬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맹인은 이 차이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죠. 그래서 ‘이상히 여기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들도 복음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영적 눈이 떠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지금 현대의 교회도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읽고 있지만 전혀 복음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13하 –14절입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 속에 복음이 다 증거가 되어 있어도 이들은 복음을 보지 못하죠. 그래서 결국 복음과 분리된 길인 인본주의 종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과 분리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15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나가라고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이 바보들이 어떻게 참 생명을 버리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바로 ‘나’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허리띠를 잡고 끌고 가지 않으시면 이렇게 우리는 내 발로 생명을 걷어차는 자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바보들의 어리석은 생각들을 더 엿보게 하시죠. 그것이 바로 16-18절입니다. 이 부분을 요약해 보면, 말씀에 나온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 그 말씀은 인정하되 그 이름(예수님)은 절대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쪽으로 작전을 세우죠. 정말 정말 바보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지금 현대 교회의 모습을 성령께서 매우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전파하되 그 핵심인 복음은 절대 절대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라는 세 단어는 가르치되 그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강하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19절-20절에서 보면, 성령께서 복음을 보게 된 자들을 이끌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은 (여기서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대표되어 나타남) 교회의 지도자들이 말하는 논리적 설교, 인과율적 설교, 교훈적인 설교 보다 ‘복음’이 더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19절에서 표현되어 있죠. 그리고 ‘그렇게 보고 들은 것(복음)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20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알게 된 분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복음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복음이 필요한 주변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알려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21절, 이 바보같은 자들은 복음의 진영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주죠. 이것도 단순히 ‘풀려났다’라고 해석하지 마세요.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은 이렇게 분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성령께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이 분리되자마자 그 다음 문구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라고 되어 있죠.
이런 식의 진행 방식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의 눈과 복음의 눈 두 가지로 해석해 볼께요. 인본주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편인 베드로와 요한이 고난과 박해에서 풀려났다. 와~~ 이렇게 고난을 끝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당시 사람들도 당연히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겠죠.
그러나 성령께서 이런 에피소드를 성령에 기록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장면을 통하여 천국의 모습을 잠깐 보여 준 것입니다. 즉 천국은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던 내가 복음의 진영으로 분리되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관계로 회복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22절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로 끝맺음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강조한 ‘사십’이라는 숫자에서 ‘4’는 성경에서 ‘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0’은 완전수죠. 즉, 이 땅에 완전하게 묶여 있던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자가 ‘병 나은 사람’이 되죠. 인본주의라는 병(죄)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이렇게 숫자를 이용해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도 놀랍지만 21절의 ‘천국’이라는 결론 뒤에 붙여서 복음의 핵심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신 것이 정말 놀랍지 않나요?
다시 한번 의역하면 ‘ ~~~ 이렇게 되어 천국이 형성이 된 것이란다. 로 결말을 내시고, 바로 붙여서 그런데 그 곳에 살게 된 자가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던 ’너‘였단다. ~~~’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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