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4:5-12(22.06.03.금)

은혜바라기 2022. 6. 3. 07:49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6절에서 대제사장이 등장합니다. 대제사장은 완벽한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히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

 오늘의 말씀은 참 대제사장인 예수님과 거짓 대제사장들을 대비하여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초점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예수님의 표지판으로써 대제사장을 통해 복음을 가르쳐 왔는데 그 어떤 대제사장도 예수님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하고 있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으로 강조되어 있죠.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이 자들은 모두 대제사장들이며 이들은 일정한 기간에 돌아가면서 그 역할을 수행한 자들이었죠. 심지어 그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다고 강조를 합니다. 이렇게 강조한 대제사장의 직분 조차 복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성령께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교회 이야기입니다. 어떤 누구도 성령의 가르침 없이는 절대 복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지금의 신학교들도 아주 똑똑한 눈먼 맹인들이 모여 ‘빨간 장미’를 어떻게 구분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눈을 떠서 ‘빨간 장미’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교회의 꼭지점, 교회의 지도자의 자리를 믿지 말라는 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 6절을 몇 번씩 읽어 보세요. 성령께서 굳이 이렇게 대제사장들을 몽땅 등장시키고 심지어 그들의 문중을 다 참여 시킨 후 그들의 ‘바보같은 행위’를 드러낸 이 블랙 코메디 같은 장면을 심도 있게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이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가? 에 대하여 나열이 되죠. 7절을 보면, 이들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라고 묻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복음을 아는 분들은 이 권세가 누구의 이름으로 행하였는지 알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바보입니다. 이 당시 이들의 상황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의 교회 이야기로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지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굳이 8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기재가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매우 강하게 개입하여 성경에 기재하신 것을 알아 채셔야 합니다. 즉, ‘베드로가 가라사대~~’로 듣지 마시고 ‘성령께서 베드로를 이용하여 가라사대~’로 들으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바보같은 대제사장들의 행위를 11절에서 이렇게 다시 비꼬아 주시죠. ‘예수님은 너희가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죠. 이 말씀은 이렇게 교회의 지도자들( 이 때 지도자들의 실체는 바로 ‘나’입니다. )이 복음을 버리고 인본주의 종교를 따른다고 할 찌라도 예수님은 그 분의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단지 2천년전의 사도행전의 대제사장들에 국한해서 들으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강조시켜 성경에 기록한 성령님의 미세한 음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인간의 영향력이 펼쳐지는 순간 복음을 보는 눈이 막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보가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바보같은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12절에서 하시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라고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까지 논리적으로 풀고 있는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아~~ 그래 예수님이라는 세 글자를 굳게 믿자~~’의 방식으로 믿음생활을 정의하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바로 ‘정체성’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바로 복음의 주인공이죠. 그리고 복음이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 계획은 바로 천지창조 전부를 뜻하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계시하고 풀어 놓으신 것이 바로 성경이죠. 즉, 천지창조와 역사 그리고 성경이 설명하는 복음 전체가 이해가 되어 그 주인공인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부처를 믿듯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천지창조와 역사 그리고 성경 전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의 작은 것 까지도 전부 ‘이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수렴된 방향성(길=예수)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께서는 이 방향성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이 방향성에 선 자들은 이 세상 인본주의와 전혀 반대의 길을 고민하기 때문에 그 자들은 고난과 박해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부르죠.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양적으로도 100% 전부 이해하고 완벽한 ‘자기 십자가’를 따르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게 될까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재미있죠?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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