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오늘 말씀도 교회에서 가장 잘못된 방향성으로 해석을 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성령 충만 받고 내 물건 네 물건 할 것 없이 통용하고 욕심 부리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자~~’의 방향성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인본주의 꼭대기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일단 오늘 말씀에서 주목할 문구는 바로 ‘성령 충만하여’입니다. 여기에 동그라미 10개를 치세요. 교회에서도 가장 많이 외치는 말이기도 하죠.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이 말씀의 본질이 뭘까요? 제가 왜 이렇게 부연 질문을 계속 할까요?
성경이 굳이 이렇게 ‘성령 충만하여’라고 기록한 이유는 바로 ‘성령께서 특별하게 개입하여 이 장면을 조율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조금 더 풀어서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복음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이 장면에 특별히 간섭하셔서 일일이 표현하고 계시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라는 표현도 같이 사용한 것입니다. 너무나 유치한 장면이죠. 생각해 보세요. 우리한테나 ‘와~~ 공간이 진동하는 기적이네~~ 엄청나다~~’라는 함성을 지를 수가 있지만 지금 우리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굳이 자연법칙까지 깨면서 공간을 흔들 흔들 흔들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매우 유치한 장면일 뿐이죠. 그런데 이런 유치한 장면을 연출하신 이유가 바로 ‘내가 특별히 개입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해석을 해야 한단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대에도 성령 충만을 받을 때 마다 땅이 흔들리는 체험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죠. 왜냐하면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이 다 설명되었다는 뜻입니다. 현대의 성령 충만은 바로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죠. 이렇게 31절에서 유치하리 만큼 ‘이 장면은 내가 직접 개입하여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란다.~~’ 즉, ‘성령 충만하여~~’ 라고 꼭 집어서 표현하신 이유가 바로 그 다음 32절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 32절이 성경에 기재되는 순간 누구나 ‘이렇게 되도록 노력하자~~’의 방향성에만 묶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31절에서 ‘지금부터의 이 장면은 내가 특별하게 개입해서 이 글을 읽는 너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이란다~~’의 방향성을 우리가 알아 채도록 하신 것이죠.
성경에서 ‘재물’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천국은 영적인 세상입니다. 절대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심지어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천국은 관계의 개념이지요. 그것도 영적 관계의 개념입니다. 절대 인간이 이해할 수가 없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 사는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가 바로 ‘부’입니다. 부, 돈, 부자, 재물, 보석 등등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인간이 그것을 원하게 만들어 놓으셨죠. 그래서 인간은 이런 것들이 ‘영원히 넘치도록 많은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천국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런 것을 통해 ‘천국’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즉, 일종의 표지판인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32절을 해석하는 올바른 방향성은 바로 성령께서 ‘천국’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자기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관계의 개념 중의 핵심인 ‘한몸원리’입니다. 그래서 32절 초반 문구가 바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는 서론을 깔아주신 것이죠. 이제 왜 31절에서 유치한 진동과 ‘성령 충만’이라는 문구가 표현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그 다음 33절이 바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곧 부활을 의미하고 그 부활은 나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기준 되죠. 즉, 예수님의 부활 속에 내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천국은 완벽한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4절 보면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밭과 집 있는 자는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매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라고 되어 있죠. 32절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켜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예수님의 역할대행이라고 제가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 구절들을 가지고 ‘초대교회 같이 되자~~’라고 노력하죠. 그런데 절대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노력을 통해 약간의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있죠.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다가 조금 만족스럽지 못하면 실망하고 뒤에서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 복음에 대한 묵상을 하시면서, 늘 숫자 4와 6에 대한 구분을 잘 하셔야 합니다. 4는 땅을, 6은 인본주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땅은 선하게 창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땅'이란 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그 제도와 법칙까지 전부 포함됩니다. 즉,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땅을 만드신 이유는 바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의' 혹은 '인류의 의'를 쌓는 것에만 사용을 하죠. 이것을 인본주의(6)라고 합니다. 그래서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을 하지 말라는 방향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을 목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죠?
성령께서는 '내것 네것 없이 통용하는 교회'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행위의 목표'로 삼아 다시 인본주의에 갖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놓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하며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해 놓으셨지만 인간은 그 선악과를 먹는 행위를 하면서 '자기 스스로 선을 쌓을 수 있다'고 판단했죠.
오늘 이렇게 부연설명을 길게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을 잘 못 묵상을 하여 '그렇구나~~ 교회에서 이렇게 내것 네것 없이 통용하는 것은 안좋은 것이구나~~~'라고 알아듣게 되면 그것도 정확하게 '행위를 하지 말라는 행위'라는 또 다른 '행위 목표'가 됩니다. 결국 이것을 '하자'라는 행위로 목표삼거나, '하지말라'라는 행위로 목표삼거나 둘 다 똑 같은 '인본주의'에 묶인 것이라는 것이죠.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악에 갖히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사실 없습니다. 그 선과 악을 통해 복음을 볼 수있는 것이 참 선이고, 복음을 볼 수 없는 것이 참 악입니다.
좀 길어졌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죠. 구약에 보면 문둥병 규례가 매우 강하게 기재 되어있습니다. 문둥병은 자신이 썩어가는 병에 걸렸는데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그대로 죽어가는 병이죠. 이 병이 인본주의를 설명하는데 매우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구약에 매우 자주,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에 걸리면 제사장이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하고 마을에서 분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문둥병이 완벽하게 온몸에 다 퍼지면 '부정한 사람'에서 '정한 사람'으로 선언을 바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습을 통해 '자신이 완벽하게 100% 죄인이라고 알게 됨' 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 사람은 완벽하게 복음을 이해한 것이라고 보고 이 자를 선한 사람으로 인정하신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되면, 이렇게 근본적이 선과 악의 개념 조차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오직 복음(그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세상의 선과 악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막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무거운 길에서 가벼운 길을 걷게 되죠. 무거운 짐을 놔두게 되고 예수님의 등에 업혀 걷게 되죠. 진정한 참 기독교를 알게 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
끝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5:12-16(22.06.13.월) (0) | 2022.06.13 |
---|---|
행4:36-5:11(22.06.10.금) (0) | 2022.06.10 |
행4:23-30(22.06.08.수) (0) | 2022.06.08 |
행4:13-22(22.06.07.화) (0) | 2022.06.07 |
행4:5-12(22.06.03.금) (0) | 2022.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