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4:23-30(22.06.08.수)

은혜바라기 2022. 6. 8. 08:12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23절에 ‘사도들이 놓이매’라는 뜻은 인본주의에서 묶여 있는 선택받은 자들이  해방되어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과 같은 선택받은 자들인 동료에게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죠.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박해하며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을 했었죠.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선택받은 자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긴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 긴 기도의 표면적인 뜻은 쉽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박해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셨고 이제 그것을 우리가 목격하였으니 우리는 더욱 더 복음을 전하는 것에 힘쓰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표면적인 기도로도 은혜가 되죠.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기도 하나 하나에 복음을 담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의 ‘한마음’이라는 단어도 매우 중요한 복음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이 단어는 ‘서로 마음을 분열하지 말고 기도하자~~’ 의 뜻이 아니라 오직 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의 기도에 우리가 참여되어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대주재’라는 뜻은 이 천지만물의 모든 섭리를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통치의 개념을 아득하게 넘어선 완벽한 통치를 말하죠. 그런데 그 통치의 목적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 실체고 천지창조는 표지판일 뿐입니다. 즉,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으로 인하여 선택받은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것이 실체이며 이것을 천지창조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알려주는 방식이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것을 부정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죠. 이것을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한다.’라고 오늘 말씀에 표현된 것입니다. 열방과 족속은 모든 역사 속 전 인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나’입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하죠. 

 인본주의는 그 자체로 ‘허사’라고 표현되어 있죠.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로 표현된 이유는 이 천지창조 모든 만물들의 질서는 오직 복음을 설명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데 인본주의는 그 반대의 가치를 추구하죠. 즉,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바벨탑은 항상 세워질 수가 없는 탑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흩어뜨리시죠.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아닌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갖는 사람도 있던데~~’ 아닙니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사람의 삶이 완벽한 삶으로 보일 뿐입니다. 많은 것을 다 가진 자는 또 그 만큼의 부족함을 느끼는 자일 뿐입니다. 권력의 최고봉인 대통령이 되어 다 가진 자가 된 것 같이 보여도 어느 날 국회의원 한 명 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분노하는 상황이 생기죠. 이렇게 인본주의는 사실 ‘분노의 역사’입니다. 

 이런 인본주의에서 탄생한 ‘세상의 군왕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26절에 나오죠.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역사가 오늘 말씀에서는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거슬린다.’라고 27절에 표현이 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과거의 예언대로 이 당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유는 바로 지금 현대 시대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모든 권력가, 모든 이방인, 모든 교인들이 합세하여 복음을 박해(오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9절에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이 되어있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더 열심히 전도를 하자~~’의 방향성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이런 모든 박해와는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도를 하지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은 전도라는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 포커스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실 것을 알려주는 것이 포커스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말씀을 우리가 이행하여야 이루어진다는 행위의 잣대에 갖혀 있죠. 그러나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선언되어진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피조물인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단지,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 속에서 풀어서 실행이 되어지는 것 뿐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 놓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앎’을 믿음이라고 하죠. 

 그래서 마지막 30절에서 갑자기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는 뜬금포가 나오는 것이죠. 그러나 복음적으로 보면 완벽한 결말입니다. ‘병’은 인본주의를 가리키는 표지판이므로 성령께서 복음을 전파할 것이라는 29절의 말씀 뒤에 이 30절,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병든) 자를 낫게 한다’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죠. 그리고 이렇게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를 그것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표적과 기사’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죠. 이처럼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가 분리되어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은 표적과 기사로 표현이 될 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느끼는 마음이죠. 그 이유는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인생의 목적은 '복음을 알게 됨(믿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엉뚱한 길(돈,명예,인기,자식,건강,정치)에서 헤매다가 늙죠. 그래서 허무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된 자는 이미 인생에서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충만과 평강을 갖게 됩니다.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를 다 하고 밖에 나가서 노는 아이와 같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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