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5:12-16(22.06.13.월)

은혜바라기 2022. 6. 13. 08:19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알아들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아직 미완성인데 그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이 땅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 성경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의 역할대행이 필요했고 그 역할로 ‘사도’라는 자들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님의 표지판의 역할도 하지만 때로는 죄인의 역할도 하게 되죠. 이 두 가지 흰색과 검은색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성령께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성령께는 사도들이 표적과 기적을 행하는 것을 허락하셨죠. 성령께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설명하시는 중이라는 방향성을 가지시면 됩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낱말만 사용하지 않으시고 꼭 ‘표적’이라는 낱말을 붙여서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표지판이다’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복음을 가르치면서 그 복음이 어떻게 선택된 자들을 찾아내어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오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12절 초반에 보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라고 되어 있는 말씀이 오늘 묵상의 초점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표지판이죠. 즉, 예수님의 손을 통하여 복음은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서, 내가 열심을 내서, 내가 봉사를 해서, 내가 헌금을 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복음이 시작 되고 끝이 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면, ‘다 마음을 같이하여’ 라고 되어있죠. ‘한몸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솔로몬 행각’에 모인다고 나옵니다. 솔로몬은 샬롬이라는 뜻입니다. 즉 평강의 왕인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과 복음의 진영에 들어온 자들은 완벽하게 분리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15절 병든 자들의 행위가 재미있죠? 엄청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 행동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표지판인 베드로의 그림자가 살짝 덮고 지나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런 어리석은 사태를 일부러 유발시키고 그 에피소드를 연출 시켜서 성경에 기록하셨죠. 그래서 이 에피소드는 매우 값진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풀어 볼께요. 현대에서 만약 15절의 행위로 어떤 자의 병이 완치가 되었다고 해 보죠. 그리고 병에서 낫은 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해보죠. ‘내가 4기 암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지나가실 때 그 그림자가 나를 한번 덮고 지나갔더니 내 암이 다 치료가 되었단다. 어때 내가 이것을 위해 거리에 침대를 깔고 누워서 그 예수님이 올 때 까지 "기도하는 노력”을 했단다. 이 노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내 암이 치료가 된 것이다.’라고 친구에서 말했을 때 그 친구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까요? (그게 왜 너의 노력이니?  예수님의 은혜지~~~)

 이제 성경에 15절이 왜 이런 방식으로 기재가 되어 있는지 아시겠죠?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종교의 여러 속성 중에 '신비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신비주의를 잘 못 생각하면 '신본주의'라고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잘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선과 악 & 이로운과 해로움)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무수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비'라는 영역을 만들어서 풀어 내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합니다. 즉, 내 기준으로 해석 할 수 없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 또 하나의 방법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신비주의'입니다. 즉, '신비주의'의 출처 자체가 바로 '나의 기준'를 보조하는 위해 만든 영역이죠.  그래서 신비주의는 바로 인본주의의 한 종류입니다. 

 

 마지막 16절에서 나온 '병과 귀신들림'은 인본주의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지판이기 때문에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설명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은 병에 걸려 치료 받지 못하면 죽죠. 그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죽는 것을 잘 가리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그 귀신에 조정되어 바른 것을 보지 못하죠. 그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인본주의가 추구하는 것만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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