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어제 묵상에서 말씀드린 ‘성령충만’에 대해 잠깐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성령충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자~~ 이제부터 내가 이 장면에 직접 개입하여 적극적으로 복음을 설명할 것이므로 그 방향성을 잘 유지해야한다.~~’는 뜻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 방향성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도 잘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레위족속은 제사장 직분을 가진 족속입니다. 그리고 ‘요셉’이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가장 강력한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등장한 인물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의 위치에 있던 자의 이름도 요셉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그 맥락을 일치시키는 이유는 정확하게 그 모든 표지판이 통일성있게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요셉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로 ‘바나바’인데 이 사람의 이름의 뜻도 ‘위로의 아들’이라고 기재가 되어 있죠. 심령이 가난한자가 애통한 자가 되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산상수훈 기억하시죠? 즉, 위로를 주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이 한 구절이 가리키는 것은 바나바를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하겠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가 그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이것을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된 자가 사도들의 발 앞에 바칠까?~~~’ 의 인과율로 생각하면 절대 이해가 안 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성부 하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복음으로 해석을 하면 ‘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쳐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의 뜻이 됩니다. 이렇게 이 구절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과 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연결된 5장에 들어가면, 그 유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장면이 나오죠. 일단 다시 한번 방향성 검토를 해봅시다. 지금 이 장면은 성령께서 적극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지하셔야 합니다. 이 방향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행동을 하지 말자~~’의 엉뚱한 길에서 헤매게 됩니다.
많은 목사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반듯이 지켜라~~’ 라고 설교하죠. 이것을 들은 많은 성도들은 연초에 작정한 작정헌금을 가지고 일년 내내 부담감이라는 짐을 어깨에 매고 신앙생활을 하죠. 이것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도대체 왜 교회는 말씀과 역행하는 것일까요?
오늘의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입니다. 이 부부가 바나바를 따라하기 위해 하나님께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전부 드리려고 했는데 결국 그것의 일부를 감추고 드렸더니 죽게 된 에피소드입니다. (바나바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안에 '예수님 흉내내기'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부가 ‘나’라는 것입니다. 조금 확장시켜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전부 이 부부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예를 들어 보죠. 십일조는 10개중 1개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와 똑 같다는 것을 지금 성령께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난~~ 다 드렸어~~’ 그러면서 나머지 9개는 자기의 삶을 위해 쓰죠. 그런데 1개를 드렸기 때문에 ‘난 율법대로 내 모든 것을 다 드린 것이야~~’라고 스스로를 속이죠. 정확하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십일조 뿐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을 전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사를 예를 들어 볼까요? ‘평생 난 하나님을 위해 헌신 봉사를 했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 직업을 통해 월급(전 사례비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을 받습니다. 그들은 보통의 직업군 보다 월등하게 노동력도 적고 일한 것에 비해 많은 자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죠. 이렇게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난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 했다~~’고 하는 목사들을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어느 누구도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 1명도 없습니다. 오직 이것에서 벗어난 자가 딱 한 명 있습니다. 그 자의 이름은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바나바 에피소드를 정확하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에피소드 직접에 배치시킨 것이죠. 그런데 이 바나바의 정체가 뭐라고 했죠? 빙고~~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오늘 첫 묵상 첫 구절에서 왜 그렇게 바나바를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레위족속, 요셉, 위로의 자식.. 으로 반복해서 소개했는지 아시겠죠?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결론은 ‘죽음’입니다. 잘 들으세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결론은 '하나님의 칭찬'이 아닙니다. 전부 다 ‘죽음’입니다. 절대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참 신앙생활이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죽고 오직 예수님만이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품 안에 내가 있는 것이죠. 1세대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다 광야에서 죽고 오직 여호수아(예수)와 2세대 이스라엘만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마지막 결론인 11절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되어있죠. 이 말씀의 해석은 바울 사도의 고백으로 마무리 하죠.
“ 빌2:12하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 ”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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