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5:26-31(22.06.15.수)

은혜바라기 2022. 6. 15. 08:1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오늘도 ‘성전 맡은 자’라는 문구로 시작되죠. 즉, 지금의 교회의 실태를 꼬집는 중이라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그 당시, 그 시대, 그 인물을 비판하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현재 나의 이야기, 현재 교회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다시 잡아 왔는데 ‘강제로 못함은 백성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라는 부연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 부연설명은 바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인본주의’에 묶여 있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이 인본주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두려워~~’ 는 ‘인본주의에 영향받아~~’를 성령께서 부연설명하는 것이죠. 

 28절을 보면, 이들은 사도들에게 절대 ‘이 이름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다고 나옵니다. 이 부분도 지금의 교회는 절대 예수님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라고요? ‘우리 교회는 매일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던데~~~’ 

 예를 들어보죠. 1,000만원짜리 노트북이 있다고 해보죠. 어떤 가족의 아빠는 이 노트북으로 열심히 인터넷 사업을 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1살 짜리 어린 아기에게 주었더니 그 노트북을 매일 깔고 앉아서 놉니다. 그래서 이 아기는 재미있게 놀려면 이 노트북 위에 앉아서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같은 노트북이라고 할 수 있나요? 

 불교에서 불상을 모셔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도하면서 잘살기를 바라죠. 그런데 교회에서도 그 자리에 예수님을 올려놓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똑 같이 기도하죠. 대체 불교의 불상과 기독교의 예수님과 차이가 뭐죠? 이 둘은 똑같은 것입니다. 둘 다 그냥 우상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상처럼 여기면서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삼가하라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제 3 계명입니다. 바로 ‘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특이하게 ‘예수의 이름을 믿어라’는 말이 자주 나오죠. 왜 ‘이름’이라는 단어를 굳이 넣으셨을까? ‘이름’이란 바로 정체성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뭐죠? 바로 복음의 주인공으로 오신 분입니다. 복음이란 뭐죠?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구원을 계획한 모든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천지창조이며, 이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성경 66권 전부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복음으로 전부 다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우리에게 알리는 방식으로만 진행이 되죠. (종교에서 생명으로 넘어오셔야 합니다. 이것이 참 구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라는 구절은 매우 매우 심각한 문구가 되죠. 즉, 복음과의 단절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 사람들 스스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말하죠.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스스로에게 심판을 내리는 중이죠. 성령은 사도행전을 통해 이렇게 치밀하게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때 사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죠. 계속 해석의 방향성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깜빡 하게 되면 이 말씀도 ‘그래~~ 어려운 고난이 닥쳐와도 전도 열심히 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구나~~~’의 방향성으로 해석이 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인본주의와 전혀 상관없이 복음을 전파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절대 전도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의 생각도 결국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어렵죠?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꿈 속에서 그 사람에게 그 꿈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동일한 것이 바로 지금의 세상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이후 30절부터 짧은 복음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조금 짧지만 정확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글이죠. 즉, ‘예수님을 믿어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복음이죠. 성경 66권 전체가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설명한 것이 신약이고 그것을 더 압축한 것이 4복음서죠. 그리고 오늘 단, 2-3절로 더 압축해서도 표현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압축하면,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이 되고 이것을 더 압축하면 ‘예수’라는 2글자로도 압축도 됩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두 글자를 ‘불상의 자리’에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의 종교에 묶여 버리면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부르죠. ( 그래서 굳이 성경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풀어서 적어 놓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 ‘예수’라는 뜻이라고 적어 놓으신 이유를 아시겠죠? )

 30절 짧은 복음의 메시지,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살펴보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하죠. 바로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고 가르친 것이 구약 전체입니다. 여기서 다시 이것을 설명하려면 책 한권입니다. 조금 간결하게 넘어갑니다.

 이후 ‘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고 되어 있죠. 굳이 사도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는 아직도 사도들의 마음에는 선민 사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우리는 알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이용하셔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방향성으로만 해석을 하면 되는 것이죠. 즉, 이 문구는 ‘우리 조상을 계속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삼아 예수님의 사역과 부활을 예언하신 하나님께서’라는 뜻입니다. 간결하게 말하면, ‘예언대로 예수님이 살게 되었다.’입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 중에서 ‘부활의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이라는 문구는 바로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부활의 이유와 목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는 바로 천국의 주인인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예수님의 정체성들이 바로 성경 66권 전체에 녹아 있죠. 이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알게 되는 것의 ‘다(모두)’는 시간의 속성을 배제한 말입니다. 어렵죠? 10명의 사람들이 마이클잭슨에 대하여 ‘내가 더 잘 안다.’고 논쟁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그 때 어느 한 흑인 꼬마가 와서 손을 들고 ‘마이클 잭슨은 내 아빤데~~’라고 하면 그 10명의 사람들은 전부 다 꼬리를 내리겠죠. 하지만 이 꼬마가 10명의 아이들 보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에 대하여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꼬마는 마이클 잭슨을 다 아는 사람이죠. 즉,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의 문제죠. 이것을 ‘다’안다의 ‘다’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시점에 내가 알아야 할 복음의 영역은 성령께서 옆에서 계속 가르치게 됩니다. 나의 신분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어서 빨리 종교에서 생명으로 넘어가십시오 !  종교는 예수라는 신을 통해 내가 '잘살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는 세상 모든 종교와 방향성이 똑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죄인, 무가치함, 무능력함을 완벽하게 깨닫게 되어 마음에 '가치상실'이 일어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이런 '가치상실'이 일어나죠. 그러나  곧 그 부분을 또 다른 세상의 가치로 채우죠. 심지어 연예인에게 몰뚜하여 그 마음을 채우는 사람들도 많죠. 이런 현상은 비일비재합니다. 자식에게, 명품에게, 차에게, 집에게 ......

 그러나 생명으로 넘어가는 예수님의 지체들은 이런 '가치상실'이 일어나서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게되면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 에 눈을 뜨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죠. 그 때부터 오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 즉, 모든 관심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집중되죠.(교회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성경과 이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과 성경은 온통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서야 비로서 '눈을 떴다'라고 일컫게 됩니다. 그 때 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해 집니다. 

 

 " 종교에서 생명으로 넘어가십시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6:1-6(22.06.17.금)  (0) 2022.06.17
행5:32-42(22.06.16.목)  (0) 2022.06.16
행5:17-25(22.06.14.화)  (0) 2022.06.14
행5:12-16(22.06.13.월)  (0) 2022.06.13
행4:36-5:11(22.06.10.금)  (0) 2022.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