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6:1-6(22.06.17.금)

은혜바라기 2022. 6. 17. 08:30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참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구제’란 ‘구원’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즉, ‘과부를 구제하라’라는 말은 남편없는 여자, 즉 남편 예수님의 잃어버린 신부인 교회를 찾아 구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1절의 말씀은, 교회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남편 예수님을 잃어버린 신부를 찾는 ‘구원’ 사역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라고 언뜻 복음의 힌트를 주는 것이죠. 

 인본주의 종교 논리로 이 1-2절을 살펴보면 매우 모순된 맥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1-2절이 모순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기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자가 많아져서 헬라파 유대인이 자기의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는 사태들이 많이 발생하므로 모든 사도들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더 힘써 교회의 일(접대에 관한 질서)에 매진하였다.’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1-2절의 모순된 맥락이 보이시죠?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사도들이 7집사를 뽑게 되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사는 설교를 담당하고 집사들은 잡일을 담당하는 정도로 이 3절을 이해하죠. 성령께서는 복음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이 상황을 성경에 기재하셨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인본주의 모양에 묶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로써 교회에서 땀 흘려 청소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죠. 목사들 또한 이 말씀을 이용하고 있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3, 4절의 말씀에서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은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사도’라는 직분은 예수님의 역할(상징, 표지판)을 맡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님과 동격으로 설명이 되기도 됩니다. 

 이 3, 4절을 조금 쉽게 의역해서 말씀드린다면 ‘너희들이 교회의 외형을 성장시키고 질서를 유지해 나가면서 부흥을 시키는 것 같지만 실제 복음의 전달과 전파는 오직 성령께서 홀로 맡아서 천국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은 조금 복잡합니다. 잘 이해하시고 있죠? 일단 사도들은 매우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나요? 사실 사도들이 진행한 이 일은 인본주의 종교식 문제 해결입니다. 즉, 교회에서 질서가 혼탁해지고 다툼이 일어나니 그것을 해결할 사람들을 택하고 자신들은 빠지는 모양새 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 멍청한 짓을 통해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하셔서 성경에 기재하신 것이죠. 

 

 예수님도 종종 이런 식으로 복음을 설명하셨죠. '시장 아이들 비유'를 아시죠? 시장에서 '내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내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는다.'라는 '시장터 아이들 놀이'를 가져다가 비유하신 것 기억나시죠? 이것도 지금의 교회는 대부분 반대로 설교를 하죠. 즉,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데 왜 너희들은 감동도 안하고 반응도 안하느냐?'라고 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반대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인본주의 목사와 교회가 아무리 '이렇게 해라. 저렇해 해라'고 말해도 복음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복음(예수님)만 생각하여 행위에 묶이지 않고 오직 복음만 생각하므로 그 인본주의 목사는 '내 말대로 너희는 절대 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장 아이 놀이 비유'에 바로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죠. 

 

 "마11:18-19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렇게 인본주의 종교에 묶인 자들의 시각과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의 시작은 180도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을 한 이후에 미완성 성경의 주인공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맡은 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행동 하나 하나가 아직도 덜 떨어진 사람들이죠. 물론 복음의 눈은 뜬 자들입니다. 이런 덜 떨어진 자들을 성령께서 적절하게 사용하셔서 예수님(성령님)의 배역으로 복음을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늘 말씀의 대 주제는 결국 ‘교회(천국)는 오직 성령께서 만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7집사들은 나중에도 교회 잡일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7집사들도 오직 말씀 전파하는 일에 집중하죠. 다시 한번 완벽하게 모순되죠?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교회 접대 등의 잡일을 맡기기 위해 7집사를 뽑는다고 했는데 내일 바로 연결된 묵상에서 나온 스데반 집사는 그 유명한 ‘스데반 설교’를 하고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이 두 에피소드를 붙여 놓고 모순시키는 이유를 눈치 채셔야 합니다. 

 즉, 복음의 눈으로 보면, 정확하게 여기서 기재된 집사의 존재는 지금의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권찰, 새 성도 등등 결국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자격이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 일곱’입니다. 이 자격을 갖춘 자는 단 한 명 뿐입니다. 즉,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일곱’입니다. 안식일의 숫자죠. 안식일의 정체성은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을 지켜라’라는 의미는 ‘일요일에 예배에 잘, 꼭 나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정체인 예수님 속에서 그 분의 지체라는 그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구약에서 강조했더니 유대인은 안식일에 이삭도 줍지 말라(추수의 행위)고 정해서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서로 서로 칭찬하죠. 현대는 일요일을 성스운 날, 즉 주일성수로 정해서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서로서로 칭찬하죠. 이것을 '막장'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의 정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집사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이 자격을 열심히 노력해라’로 가르치죠. 그러면 예수님의 필요성이 없어집니다. 예수님과 분리되어 심판이 되는 것이죠. (서신서에서 보면, 집사, 장로, 교사 등의 자격을 쭈~~욱~~  나열해 놓은 곳이 많이 있죠. 그런 사람을 뽑으라는 식으로 해 놓았죠. 그러나 그 말씀 속의 비밀은 바로 그 '자격 조건'은  '예수님의 자격'을 나열해 놓은 것입니다. -- 우리는 그 분의 지체가 되기 때문에 그 자격을 공짜로 얻게 된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이것을 '복된 소식(복음)'이라고 합니다.  )

 마지막 6절에서 사도들이 7집사에게 안수하는 장면으로 끝이 나죠. 이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손과 나의 머리가 합쳐진 상태, 즉 예수님과 한몸(지체)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웃긴 것은 현대 교회에서 목사,장로, 안수집사가 안수 받고 그 직분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이 의미를 알고나 할까요? 아마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분을 줄 수있는 '안수권'을 허락하셨다고 믿을 가능성이 높죠. 웃기는 짬뽕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습을 볼 때 그냥 ‘프로그램’ 으로만 인식하시면 됩니다. '영적 능력'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지 않습니다. 한번은 노회장 목사가 와서 교인 모두에게 인심쓰듯 안수기도를 해주는데 저와 우리식구는 안수 기도를 거부했죠. -- 그런것 보다 그냥 집에서 부모가 자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 

 성령께서 이 6절을 성경에 기재하신 이유는 ‘이렇게 해야 직분들을 받을 수 있다.’의 행위를 강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행동을 한 당시 사도들은 멍청한 행위를 한 것이죠. 즉, 아직도 구약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행위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것을 성경에 기재하여 복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부연설명을 하죠. ‘안수’의 정확한 의미는 바로 ‘하나 됨’입니다. 즉, ‘안수’는 ‘분리의 반대말’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에 안수하는 것은 제물과 나를 하나로 일치 시키는 것이죠.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죄를 제물과 공유하여 그 제물을 드리므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안수하시는 것은 바로 죄인들을 예수님의 지체로 만들어 ‘의’롭게 동질화 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더 깊은 숨은 뜻은 이 죄인들의 죄를 예수님께서 넘겨 예수님께 나의 죄를 입혀 제물로 만드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너무 은혜가 되죠?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제물로 희생되는 것이죠. 그래서 피조물이면서 죄인인 요한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안수하는 장면은 모든 인류의 죄를 전부 다 예수님께 넘기는 장면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죠. 엄청나죠?

 그래서 오늘 6절 ‘안수’ 장면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고 싶은 복음은 바로 이 7집사가 예수님과 동질화 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말씀부터는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안수행위는 그것을 통해 무슨 영적인 능력이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잠시 기록한 것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행위를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이해하여 복음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 됩니다.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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