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오늘의 묵상은 어제 베드로의 짧은 설교가 끝난 직후입니다. 어제 묵상의 주제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죠. (너무 길어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어제 묵상을 못하신 분은 어제 묵상을 하고 오세요.)
32절의 ‘증인’이라는 말을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에서 이 ‘증인’이라는 단어를 너무 소극적인 개념에만 적용하죠. 즉, ‘말씀을 전달하는 것’에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증인이란 단어의 핵심은 더 깊게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부터 출발하죠. 즉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증인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예수님 아니면 안 되는 존재구나~~~’을 알게 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절로 밖으로 표현시키는 것을 전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이 메카니즘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런 ‘증인의 삶’을 사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결론을 갖게 되죠. 즉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 계획으로써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32절의 다음 문구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라는 말씀이 나오죠.
그랬더니 ‘그들이’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하죠. 이렇게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은 극단적인 대립을 하게 됩니다. 방향성을 다시 한번 잡을께요. 여기서 ‘그들’은 ‘나’입니다. 이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만약 지금 현대 교회에서 참 복음이 전해지면 모든 자들은 전부 그 복음 혹은 그 복음을 전하는 자를 박해하게 됩니다. ‘아닌데~~ 난 말씀이 좋던데~~’라는 분들은 아직도 복음을 잘 모르는 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 절대 안 그럴 것이다.’라고 착각을 하죠. 이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바로 ‘베드로의 닭 울기 전 3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하고도 그 분을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했죠. 이 에피소드를 무겁게 성경에 적어 넣으신 하나님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에서 말씀을 듣게 되면 위로가 되고 기분이 좋지? 그 이유는 대부분의 설교가 인본주의 종교식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휼륭한 복음의 설교라도 이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모두 이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12제자 뿐 아니라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인본주의적 위로로 해석하면서 듣기 때문에 듣기 좋은 말씀이 되는 것이죠. --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셔서 선택된 자들에게 그 본질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비밀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오직 성령께 달려 있습니다.)
이후 ‘가말리엘’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 자에 대한 설명이 잠깐 나오죠.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나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 성령께서 이렇게 가말리엘에 대한 좋은 평가를 굳이 넣으셨을까요? 다시 이 자의 평가를 의역해보죠. 이 자는 ‘성경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최고의 신학자이며, 목사이면서 그 인격이 매우 휼륭하여 모든 사람이 다 존경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어때요? 이제 이유를 알겠나요? 그 이유는 바로 ‘너희들이 가장 존경하는, 즉 지금 교회에서 가장 휼륭한 자라고 평가된 자의 복음에 대한 생각을 이제부터 보여주마’입니다. (부정석 메시지입니다.)
성령께서 힌트부터 주시죠. 34절 후반절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라는 문구가 나오죠. 즉, 복음과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즉, ‘이제부터 인간의 논리와 인과율로 진행되는 것이다.’라는 시그널입니다
이 자가 이 전의 사건인 ‘드다 사건과 유다 사건’을 예로 들죠. 즉, 인간의 역사 중 한 장면을 끌어 내어 그 역사를 통해 지혜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인 즉슨 이 드다와 유다가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들었지만 결국 다 흩어져 버린 사건을 예를 들죠. 이와 같이 이 예수의 사건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문구를 덧붙이죠. 39절 하반절에 보면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께 났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라는 것이죠. 재미있죠? 이 39절 하반절은 가말리엘의 중심 생각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믿음이 있다면 감히 드다와 유다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 두지 못하죠. 이런 생각은 자기의 논리를 더 굳건하게 하려는 ‘핑계논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핑계논리’ 안에 ‘진정한 복음의 논리’가 들어 있죠. 그래서 성령께서 이 장면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이 자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의 논리가 사실은 어리석음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속에서 핵심 주제인 복음을 설명하는 이중 기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다시 보면 이 ‘가말리엘’의 에피소드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며’ 라는 이 세가지 문장을 성령께서 이용하셔서 이들은 모두 복음과 반대되는 방향성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죠.
41-42절은 이후 성령께서 교회를 어떠한 모습으로 이끄시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박해를 받게 되고’ ‘그러나 그것을 기뻐하게 되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전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방향성만 잘 잡으세요. 이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교회를 끌고 가실 것을 의미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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