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7절은 성령께서 말씀을 전파하여 복음이 점점 더 확장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셔서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의 빈자리가 많아지고 세상의 교회 건물들이 점점 더 없어져도 성령께서는 절대 그 분의 사역을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과 성령께서 생각하시는 부흥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흥’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 7절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죠.
8절에서 드디어 ‘스데반’이 나오죠. 스데반은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이 세상에서 왕관을 쓰는 사람이 되라고 지은 이름이겠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뜻을 이용하여 이 세상 왕관의 진정한 주인인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런 식의 말씀 해석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8절의 스데반은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죠. 정확하게 예수님의 표지판(상징)으로써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스데반도 복음 때문에 순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성경에 기재되기 위함이죠.
9-10절에서 보면 자유민들이 스데반과 논쟁하고 스데반의 말을 당하지 못한다고 나와 있죠. 그런데 그 중간에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이라는 문구를 삽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에피소드를 ‘스데반이 말을 잘해서, 논쟁을 잘해서, 똑똑하여 그들을 말로 이기고 있다’라는 식의 해석으로 몰고 가면 안됩니다. 스데반이 촛점이 아니라 '지혜와 성령'이 촛점입니다.
절대 이 세상의 지식은 복음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너무 ‘왜곡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참 지혜이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가 왜곡된 지혜죠. 오늘의 주제는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13절에 보면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라는 문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과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성령께서 고발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 대항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바로 ‘거짓 증인들이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리신 결론입니다. 13절을 계속 보면 ‘이 사람들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라고 되어 있죠. 성령께서는 완벽하게 복음의 반대에 서 있는 자들의 거짓말을 꼬집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스데반이 말한 복음의 핵심을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로 비틀어서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복음을 말씀 속에 감추어 놓은 비밀의 책이죠. 그 비밀을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성령께서 가르치면서 예수님의 신부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인간은 성령 말씀을 통해 오직 그 겉의 ‘종교’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모든 설교는 거짓말(허풍)이 되죠.
그런데 15절 ‘사람들이 보니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로 중간 결론을 맺죠. 이제부터 설명하려는 것은 성령께서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조금 어렵고, 잘 못 들으시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질문입니다. 이 당시 스데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정말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변했을까요? 정답은 ‘우문’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것에 주목합니다. 이런 현상을 나에게 나타나기를 바라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보여지는 장면이 필요했죠. 물론 성령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그렇게 만드실 수도 있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복음이라는 초점이 벗어나서 '신비주의'로 가기 때문에 중간에 ‘사람들이 보니’라는 단어를 넣으신 것입니다.
즉, 이 당시 100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98명은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 ‘악마와 같더라’는 생각을 하였고 그 중 두 명 정도가 ‘얼핏 보니 천사의 얼굴 같기도 하네~~’ 라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을 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98명의 생각보다 2명의 생각을 이용하셔서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성경에 말씀을 기록하여 복음을 설명하시는 메커니즘이 이해가 되시죠? 성령께서는 오직 ‘복음을 설명하는 것’만 필요로 합니다. 즉, 오직 예수님만 필요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오직 ‘행위’만을 주목하죠. 그래서 기적을 기적으로만 보게 되죠. 그래서 만약 이 장면을 '사람들이 보니'가 아닌 ‘성령께서 보니'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를 나게 하사~~’의 방식으로 기록하셨다면 더 더욱 복음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기적적 장면만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는 것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생겨 나겠죠.
그럼 이15장에서 밝히고 싶은 핵심은 뭘까요? 정답은 계속 스테반을 예수님의 표지판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나오는 말씀이 그 유명한 스데반의 긴 설교와 순교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긴 설교와 순교를 스데반이라는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일하심으로 집중시키려는 것이 핵심입니다.
지금 현대에서 예수님의 표지판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오늘의 15절을 조금 어거지 써서 표현하면,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 쓰여진 말씀을 주목하여 보니 그 말씀 하나 하나가 성령으로 인하여 모두 빛이 나더라’입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다시 더 의역해서 말씀드리면, '성령으로 인하여 말씀 하나 하나가 전부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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