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사도행전 7장은 전체가 모두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60절까지 있죠.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해석을 하면 일 년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몇 개의 문단으로 나누고 그것을 조금 간략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묵상을 하겠습니다. (참고로 사도행전이 끝나면 창세기를 묵상할 예정입니다. 재미있겠죠? )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큰 4가지 에피소드가 있죠. 첫째 창조의 시작, 둘째 아담과 하와 그리고 선악과 에피소드, 셋째 노아의 방주 넷째 바벨탑 이 네 가지 에피소드는 매우 선이 굵은 복음의 진행 과정을 담은 사건이므로 늘 기억해 놓으셔야 합니다. 이 부분을 매우 짧게 설명드리고 넘어갑니다.
창조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계획하고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셔서 그 안에 복음을 해석해 넣으신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에피소드에서 하나님과 분리(죄)가 되었죠.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에피소드에서 인간을 전부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방주, 노아, 무지개라는 상징을 통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셨죠. 그러나 바벨탑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은 그들만의 세상인 인본주의를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인본주의는 하나님께서 모두 흩어뜨린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 내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인간 중에 ‘아브라함’이라는 예수님의 강력한 표지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아브라함은 모든 구원받는 성도들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과 교회의 공동 표지판이죠. 그래서 성경은 ‘한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이 안됩니다.
오늘 말씀인 행7:2에서는 아브라함이 단지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라고만 표현이 되어 있지만 창세기에서 보면 '우상을 조각하는 가정'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져 있죠. 이 말은 하나님과 완벽하게 상관없는 분리된 자(죄인)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드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은 그들의 조건과 능력 때문에 선택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은 조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런 우상을 만드는 가정에서 탄생한 자 조차도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이끌고 가시면 복음을 잘 알게 된다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3절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라고 되어 있죠. 신앙의 시작은 바로 인본주의와의 분리입니다. 다시 한번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구원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도구로 사용하셔서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인본주의와 반대말은 신본주의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을 기준으로 사는 삶을 뜻하죠. 그래서 3절 후반 부 ‘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는 말은 바로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제 묵상이 인본주의와의 분리를 항상 강조하죠. 그리고 더불어 늘 복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즉, 인간은 선악과 사건 이전에 늘 하나님의 기준(신본주의)으로 살다가 선악과 사건 이후에는 인간의 기준(인보주의)로 바뀌었죠.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이 성경 66권 전부입니다.
그래서 반복하면, 오늘 스데반 설교의 시작도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즉 인본주의에서 분리되어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즉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분리하라는 것은 인본주의와 금을 긋고 그것으로 부터 해탈하려고 노력하고 연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절대 인본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식하고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죠.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바로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설명드리죠. 율법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즉, 말씀을 인본주의로 해석하여 지켜내는 방식입니다. 즉, 성경에서 ‘술에 취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나오면 그것을 인본주의식 논리로 풀어서(묶여서) ‘절대 술먹지 맙시다. 혹은 술을 먹어도 취할 때 까지 먹지는 맙시다.’라는 방향성입니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이유는 ‘술 취함’의 상태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기 때문에 그 '본질'을 가져다 쓰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그 문장의 문자 자체의 뜻에 묶여서 ‘술 먹음 & 안 먹음’의 행위가 신앙의 잣대로 활용되는 이상한 종교가 되어 버렸죠.
이렇게 기독교는 영지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한가지를 더 추가하면 신비주의라는 세 가지 큰 누룩이 존재합니다. 이 세 가지 모두 인본주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이단이죠. 즉, 이 세가지는 결국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선택된 자들도 이 세 가지 누룩에 늘 영향을 받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늘 인본주의라는 인생의 방식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시죠.
흰색을 설명하기 위해 검은 색을 옆에 놓고 설명하는 것을 생각하시면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검은 색은 절대 흰색으로 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흰색이 되려고 하죠. 그것이 바벨탑입니다. 검은색은 '나' 흰색은 '예수님'임을 아는 것이 정확하게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빛이 안들어오는 검은 색 상자 안에서 검은 색의 몸과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검다는 것을 모릅니다.(인식 자체를 할 수 없죠.) 이때 성령께서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흰색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죠. 그때서야 비로서 내가 얼마나 검은 색인지를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검은 색인 내가 신앙으로 흰색이 되려는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도 종교의 범위에 묶이면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검은색'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참 기독교는 내가 절대 흰색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흰색인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심판이라도 합니다. 결국 신앙의 끝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열심히 사세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많은 돈, 휼륭한 자식 키우기, 인격있는 신앙인 되기, 더 많은 기부, 더 많은 봉사를 하세요. 죽을 힘을 다 해서 흰색이 되려고 노력하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살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 내가 갈 수 있는 모든 방향의 끝을 경험해도 결국 나는 흰색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목적입니다.
살아 있는 부모의 유산을 강탈해서 부모로 부터 벗어나서 그 유산을 다 탕진할 때 까지 살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짐승의 먹이를 훔쳐먹는 비참함까지 도달해야 인간은 비로소 '부모의 집'을 그리워하게 되죠. (탕자의 비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짐승의 먹이를 찾아 끝까지 헤매다 죽습니다.(심판) 그러나 그 중 소수의 사람들은 다시 '부모의 집'을 향해 눈을 뜨게 되죠. (구원)
우리에게 '부모의 집'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가 변해서 '부모의 집'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라는 '예복'을 입은 자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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