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빌립은 일곱 집사 중에 한 명이죠. 교회가 커지면서 분쟁이 일어나자 12 사도들이 교회의 봉사에 전념하는 일곱 집사를 뽑았죠. 그리고 자기들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몰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말씀을 전하다가 죽고 오늘 말씀의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라는 선교지에 방문하여 선교활동을 하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왜 집사들은 교회 잡일(?)은 하지 않고 말씀 전하는 일에 충성하는 것일까요?
사도행전을 사도의 행전으로 보게 되면 모순에 갖혀 버립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즉, 초대 교회에서 봉사의 일로 교회의 분쟁이 생긴 것도, 그것을 통해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뽑아 그들에게 봉사를 맡기려고 한 것도 전부 인간의 한계(죄)에서 온 결과물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일곱 집사라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니 이 집사들은 봉사가 아닌 말씀을 전파하는 상황에 주력하게 되었죠. 이 모든 상황은 성령께서 복음을 설명하고 전파하는기 위해 전부 다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채셔야 합니다.
그래서 집사가 교회의 봉사를 하는 역할이냐? 아니면 말씀을 전하는 역할이냐? 의 논쟁을 아직도 합니다. 대부분 이 두 가지를 절충하죠. 그렇다면 복음의 눈으로 보는 집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없습니다. 참 교회적 의미로써의 교회 모든 직분의 역할은 의미도,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만 계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품 속에 있는 그 분의 지체일 뿐이죠.
그러나 사는 동안, 인본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옛자아의 입장에서, 교회는 집사도 필요하고, 권사도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하겠죠. 하지만 이 직분에 묶이는 것을 '지옥'이라고 하고 이것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은 '선택된 자'라고 합니다. 이것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라는 것은 오직 교회는 예수님의 영향력으로만 살아 있게 된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역할론은 실체와 그림자를 혼동한 결과입니다. 즉, 성경에서도 장로, 집사 등등의 많은 역할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나오죠. 그리고 현대의 교회에서는 그 역할을 ‘직분’으로 만들어서 그 자리에 사람들을 배치하죠. 이런 것이 잘못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교회의 곳곳에 배치되어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교회의 조직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풀어 볼까요? 오직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신부)로, 그 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흙에서 직접 만들어 지지 않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출발하죠.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기 위해 꼭 '남자의 갈비뼈’라는 재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죠? 이것은 상징입니다. 이것을 '너는 예수님과 원래 한몸이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명도 아닌 다수의 선택받은 자들, 곧 교회에 적용시켜서 설명을 하셔야 하는데 그것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한 예가 바로 교회에서 각자가 직분을 맡아서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굳이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해야만 하와를 만드실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굳이 교회의 직분을 사용해야만 교회가 탄생, 성장, 유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판단하셨기 때문에 선택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에 묶여 그것을 고집하거나 교회에서 인간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흡사 하나님께 '왜 자식이 태어 날 때 부모의 갈비뼈를 빼서 만들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어리석을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나게 만드셨죠. 이것도 결국 한몸원리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부모된 하나님(예수님)과 '나'는 원래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러니 뼈로 출발을 하던, 자궁에서 출발을 하던, 교회의 직분으로 교회에 속한 자가 되던 그 모든 것은 전부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그 복음의 속성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더 잘 알아가는 것,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더 잘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이 목적이죠. ( 망원경을 주면 그것을 통해 목표를 봐야하는데 그 망원경만 보고 그 망원경만 닦고 그 망원경만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
이제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 복음적으로 조금 납득이 가시죠? 천지창조도, 성경도, 교회도 전부 복음에 대한 설명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죠.
이제 빌립을 조금 묵상해볼까요?
이 빌립도 ‘빌립’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빌립’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빌립도 정확하게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등장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행적(기적과 표적)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빌립이 이런 능력을 받았구나~~~~’의 방향성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성령께서 이 빌립에게 이런 능력을 주고 사용토록 한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우리가 예수님의 행적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여 복음을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빌립이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그 인본주의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본주의에 묶여서 오직 그 꼭대기(즉, '잘살기')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귀신들린다’는 것입니다.
돈, 명예, 인기, 인격, 자식 등에 매몰되어 오직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일하고 그것을 위해 죽는 인간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귀신에 들여 그 귀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귀신이 시키는 행동만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빌립이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을 고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진리를 늘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부분이 마비되어 있는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 이며, 복음의 길을 걷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못 걷는 사람' 이죠. ( 중풍걸리면 입이 돌아가서 말을 못하죠.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인본중의에 묶인 자들을 복음의 진영으로 인도하니 비로서 8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결론이 맺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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