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38절은 네 부류가 나옵니다. 1. 천사 2. 우리 조상 3. 살아 있는 말씀 4. 그 말씀을 주던 자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죠. 그리고 ‘우리 조상’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38절에서도 이들을 ‘광야 교회’라고 다시 지칭하죠. ‘그 말씀을 주던 자’는 모세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하나님의 대언자를 지칭하죠. 출애굽기에서는 모세에게 말씀주실 때 천사라고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여 가르치는 듯한 모습으로 나오죠. 그런데 이 모든 구분을 사실 영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 천사, 교회, 예수님, 모세(선지자) 이 모든 분류는 영적으로 전부 예수님의 품 안에서 같은 지체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한몸원리’라고 하죠. 그러나 똑 같은 인격은 아닙니다. 결국 복음의 가장 큰 핵심 속성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원리는 이 세상에서는 절대 완벽하게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올바른 방향성만 주고 있을 뿐이죠. 즉, 진리의 길에 서게 만들게는 하지만 그 길의 끝은 우리의 능력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 자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39절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늘 애굽을 그리워한다고 나옵니다. 즉, 인본주의가 주는 행복을 늘 그리워하고 그것을 찾는다고 나오죠.
40-41절은 그 유명한 ‘송아지 우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몇 번을 묵상한 내용이지만 한 번 더 해보죠.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다가 이 송아지 우상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유대인들을 보면서 ‘이 미련한 놈들~~~’이라고 욕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 장면이 그렇게 쉽게 볼 대목이 아닙니다.
당시 근동 지역 여러 종교 의식을 보면, 그들의 신들을 더 빨리 자신들에게 내려오도록 하기 위해 신도들이 어떤 ‘자리’를 만드는 행위를 하곤 했죠. 그 ‘자리’중에 ‘송아지의 등’이 많이 나옵니다. 즉, 유대인들이 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더 빨리 내려오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그 ‘자리(송아지 등)’를 만든 것이죠. 그것을 지도자(목사)들이 계획을 하였고 교회는 그것을 실천을 하게 되면서 결국 사람은 그 송아지 자체를 우상화시키게 된 것이죠.
이것은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간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이해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와 시기가 되면 성령께서 오셔서 그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가장 못하는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노력’을 하죠. 그 프로그램이라는 ‘자리’로 빨리 성령을 불러 앉혀서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각종 헌금, 각종 기도회, 각종 봉사와 기획들 등등 교회에서 행하는 인간의 영향력이 포함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어때요?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가 가시죠?
이 때 살아 있는 말씀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단단함을 상징하는 두 개의 돌판 계약서로 되어 있죠.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계약서)이 그대로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오면 그들은 다 죽게 되죠. 그래서 그들이 모두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말씀(예수님)이 내려오다가 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방향에서 보면 복음(복된소식)이라고 합니다. 정말 민망하고 먹먹하죠?
다시 본문으로 가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42절에서 ‘너희가 광야에서 40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없었다.)’로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시죠.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이 공통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나의 신앙 생활은 모두 엉터리였다.’입니다. 이것을 이사야도 그의 선지자 노릇을 하다가 깨닫게 되었죠.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교회의 모든 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나의 신앙도, 나의 예배도, 전부 엉터리입니다. 이렇게 전하여도 고개를 끄떡 끄떡 하는 사람이 복음의 눈을 뜨고 있는 자들이며 이것을 전하면 불같이 화를 내고 비판하는 자들이 바리새인, 즉 인본주의 종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오직 예수님만 받으시죠.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엉터리 예배, 엉터리 신앙을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의 실체를 알게 하셔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게 하시죠. 이런 단계를 어스름하게 느끼는 분이 아니라면 오늘 이 묵상을 보면서 ‘이단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해합니다. 결국 인본주의 방향성에서는 절대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죠. (그렇다고 교회를 다니지 말거나 모든 프로그램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할수록 그것이 모순된다는 진리를 잘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메카니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선택받은 백성에 국한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다시 43절에 보죠.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다.’고 하시죠.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밖에 라는 말은 인본주의 풍요에서 옮겨서 고난의 광야로 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상의 본질은 바로 ‘나’입니다. 우상은 사실 전부 허상입니다. 나의 옛 자아가 바라는 바를 외부의 형상에 투영시켜서 그것을 향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가 바로 우상의 실체입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를 내가 직접 보고 만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외부에 형상화 시켜서 그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지나가면 그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메카니즘을 만들어 놓는 것이죠. 그 옛자아가 간절이 바라는 바는 결국 인본주의 꼭대기입니다. 즉, 바벨탑이죠. 그 바벨탑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메카니즘에 묶여 있는 선택된 자들을 그 바벨론에서 밖으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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