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9:1-9(22.07.11.월)

은혜바라기 2022. 7. 11. 08:23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드디어 사울(바울)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러나 전의 묵상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절대 바울에 초점이 두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복음을 설명하고 기록하기 위해 선택한 인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역할이 인간적 기준에서 보면 너무 큰 역할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복음을 훼손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교회를 가장 핍박한 인물 중에서 뽑아 선정한 것입니다. 아애 처음부터 바울에게 관심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창시자가 바울이라는 말 까지도 하게 되는 지경까지 왔죠. 혹은 아들을 낳으면 ‘바울’이라고 이름까지 짓곤 하죠. 인간이 다 이렇습니다. 

 오늘도 사울(바울)은 1절에서 보세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되어있죠?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이 바울은 사도로써 예수님의 표지판의 역할도 하게 되고 교회의 역할도 하게 되고 죄인의 역활도 하게 됩니다. 즉, 교회(나)의 정체성이 바로 ‘예수님을 위협하고 죽이는 역할’이라는 것을 오늘 1절에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초점을 잘 유지하면서 말씀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3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여기서 ‘홀연히’라는 뜻은 ‘갑자기’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도 복음의 속성을 잘 설명하고 있죠. 즉, 내가 복음을 알게되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되는 속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알게 되고 뒤를 돌아 보면 나의 탄생 순간부터 모든 인생에 걸쳐 성령께서 관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죠. 

 ‘빛’은 매우 강력한 복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은 사물을 보게하죠. 즉, 진리를 ‘보게 된다.’ ‘깨닫게 된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의 첫째 날 ‘빛이 있으라’의 이 빛이 바로 오늘 말씀의 이 빛입니다. 복음입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태양은 빛이 아니라 빛을 설명하는 많은 표지판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태양이 있는 경우를 ‘낮’이라고 칭하죠. 그 낮 동안 우리는 ‘길’을 잘 걷게 되죠. 그리고 그 빛으로부터 많은 생명이 탄생을 하고 유지를 하죠. 이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것(태양)일 뿐입니다.

 

 이에 반해 달은 그 빛을 스스로 내지 못하고 오직 태양 빛을 반사할 때만 빛을 낼 수있죠. 이 달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영향을 받을 때에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천지만물은 다 복음을 설명하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 물, 짐승, 새, 채소 ..... 전부 다 복음을 설명합니다. 사도행전이 끝나면 창세기 묵상을 할 텐데 그 때 더 자세하게 묵상하겠습니다. 흥미진지하겠죠?)

 4절 사울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라고 표현이 되어 있죠. 이렇게 ‘땅에 엎드러져’라는 표현은 우리가 모두 ‘죽은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이지만 이 땅에서는 움직이는 사람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좀비입니다. 좀비가 걸어다닌다고 살아 있다고 하지 못하죠. 인간이 만든 영화와 드라마 조차 하나님의 퍼즐(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의 본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고 말씀하시죠. 매우 매우 중요한 복음의 속성이 설명됩니다. 사울은 결코 예수님을 박해한 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교회만 박해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교회를 ‘나’로 표현하셨죠. 이렇게 복음은 ‘한몸원리’를 알게 되야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리고 사울로 표현된 ‘나’는 항상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똑같은 말이 5절에 다시 나오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렇게 성경에 두 번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강조법입니다. 성경이 모두 우주보다 값진 말씀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말씀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진리’라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절대 우리가 잊지 말고 이마에 써서 붙이고 다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말씀은 사울에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나’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나는 나를 박해하는 너를 구원하는 자이다.’라는 뜻이죠. 이 아이러니한 모순을 이해하십니까? 인간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들어오셔야 하죠. 지금 예수님께서 바울에서 오신 이 장면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여야만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계획하시고 이행하셔야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가 있죠. 내가 더 나쁜 놈이 되어야 더 큰 은혜에 거하게 되는 이 모순이 이해가 되십니까?  인본주의라는 틀 속에는 이런 메카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 모형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부모의 자식 사랑 속에 비슷한 형태를 심어 놓으셨죠.)

 7절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니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있다’고 나옵니다. 이것도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죠. 즉, 선택된 자가 아니면 절대 그 누구도 복음을 듣거나 보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8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니 못하고’라고 되어 있죠. ‘땅에서 일어났다’라는 표현은 바로 거듭남을 뜻합니다.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죠. 그런데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죠. 이것은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휼륭한 유대인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복음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사울이 영적인 눈을 뜨고 보니 이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라는 것, 즉 내가 행했던 많은 업적들이 모두 무가치한 것이라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마지막 9절을 보면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라고 되어있죠. 사흘의 3이라는 숫자는 성부,성자,성령의 숫자입니다. 하늘(복음)의 숫자죠. 즉, 복음을 위해 보지 못하고 먹지고 마시지도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동안 땅속에서 죽으셨던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더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3일 동안 땅 속에서 죽으셨던 기간은 선택된 자들이 이 땅에 내려 와 살고 있는 인생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알려주시려고 그들을 이 땅의 인본주의 시스템에 잠시 보내신 것이죠. 그것을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재현하시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3일,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부활시켜서 선택된 자들이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울(바울)을 통해 다시 한번 예수님의 이 행적을 반복하여 이 글을 읽는 자들에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9:19-25(22.07.13.수)  (0) 2022.07.13
행9:10-19(22.07.12.화)  (0) 2022.07.12
행8:25-40(22.07.08.금)  (0) 2022.07.08
행8:9-24(22.07.07.목)  (0) 2022.07.07
행8:5-8(22.07.06.수)  (0) 202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