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9:10-19(22.07.12.화)

은혜바라기 2022. 7. 12. 08:23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오늘의 말씀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사울의 눈을 뜨게 하는데 주님께서 직접하시면 되는데 굳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 하실까요?  그 이유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아나니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사울을 왜 선택한 것인지에 대한 것을 아나니아에게 대답해 주는 장면은 아나니아의 궁금증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기적과 환상을 통해 역사하시는 장면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으로 해석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과 환상의 겉 모양에 초점을 맞추시면 안됩니다. 

 11절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유다의 집은 예수님의 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유다 지파였죠. 그리고 다소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방 나라를 의미합니다. 다소는 로마의 유명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이 11절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예수님의 지체를 찾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다시 12절에서 반복하여 풀어 주십니다. ‘그(사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죠. 아나니아는 ‘성령의 표지판’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바울(나)이 복음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어렵지 않죠?

 이때 아나니아가 사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것을 고발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다시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나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들추어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15절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15절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죠. 즉, 사울을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쓰시겠다는 선언입니다. 

 16절을 보면 더욱 확실해 지죠.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완벽하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시죠. 

 해석이 많이 어려워졌죠? 사울은 나(죄인)의 표지판이면서 예수님의 표지판이 되고 있죠. 한 사람을 가지고 두 가지 정체성을 풀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그 해석이 힘들죠. 그래서 성령께서 굳이 ‘아나니아’라는 별도의 인물을 선택하고 기적과 환상이라는 도구까지 동원하여 그 사람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 어려운 복음의 난제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한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해석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같은 사람이 이름이 바뀌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사울은 바울로 바뀌죠.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바뀌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을 변화시켜 새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죄인(나)과 의인(예수님)이 동시동존하는 것을 뜻하죠. 정말 정말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표는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래서~~~~  예수님만 소망한다.~~~’입니다. 

 17-19절에서 사울은 결국 눈을 떠서 다시 보게 되고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지죠. 성령께서 이 땅의 예수님의 지체를 찾아 결국 복음을 알게(보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강건하게 탄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후 3일 동안 땅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그래서 9절에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라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셔서 3일 동안 땅에 묻힌 후 부활하신 장면 자체가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가 이 세상(땅)에 내려와서 인본주의에 묻힌 후 복음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괜히 3일 동안 땅에 갖혀 있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 조차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모두 복음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설명하는 것이죠. 성경은 복음을 여러가지 각도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하나님께서 '이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면서 '무지개'로 약속하셨죠. 인간은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굴절'을 만나면 스펙트럼이 생기죠.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로 빛을 드러내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신기하죠?

 

 빛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 볼 수가 없죠. 그 분은 빛과 같습니다. 그런데 볼 수 있는 빛인 무지개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그리고 성경은 그 예수님을 빨주노초파남보 처럼 여러가지 색, 즉 여러 각도, 형태, 모양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색깔을 다시 합쳐보면 결국 '예수님(빛)'만 남죠. 

 

 그런데 이런 무지개를 구성하는 색의 종류 조차도 '7가지' 입니다. 7은 천국의 숫자죠. 즉, 예수님의 모든 것은 천국을 설명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무지개는 이 땅에서 그 시작과 끝을 찾아 볼 수가 없죠. 무지개의 시작을 찾으려고 눈으로 보고 따라가도 결국 그 땅의 장소에 가서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국은 이 땅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는 언제라도 태양(빛)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집니다. 즉, 천국은 오직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죠. 이런 간단한  모든 자연법칙 조차 수 십개의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죠. 

 이렇게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상은 '법칙과 질서'가 존재합니다. 그 법칙과 질서의 통로를 따라가면 복음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어 있죠. 그런데 그 법칙과 질서의 목표를 보지 못하고 오직 그 '법칙과 질서'의 알고리즘만 이용해서 인간은 '삶'을 살죠. 그 알고리즘의 한 부분을 떼어서 과학, 정치, 경제등에 활용해서 인간의 '잘살기'에 이용해서 살아갑니다. 즉, 유일신 1이라는 하나님으로 부터 출발해서 이 땅인 4에서 머물면서 복음인 3을 찾아 7인 천국(안식)을 보는 것이 목표인데, 그 7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6에 묶여 버린, 즉 이 땅인 4에 자기의 증거인 2만 고집하여 6에 묶여 버린 것을 "땅 지 + 묶일 옥" 지옥이라고 합니다.  "잘살기"에 묶인 자가 되면 안됩니다. 광야같은 삶을 살아가십시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눈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복음의 눈을 뜨고 '바울'로 바뀐 것을 말하죠. 여러분~~ 이런 눈으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세요~~~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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