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9:19-25(22.07.13.수)

은혜바라기 2022. 7. 13. 07:35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오늘부터 사울은 완벽하게 예수님의 표지판으로써 활동을 시작합니다. 바로 직전에 성령으로 인해서 눈을 뜨게 된 이후죠. 

 다시 한번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사울이 변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전도’였더라 그러니 우리도 전도하자.” 의 방향으로 가시면 안됩니다. 사울의 행위에 절대 초점을 맞추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께서 사울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20절을 대하는 우리의 초점은  ‘전도하자’ 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누가 몰라???’ 라고 반문하겠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 모릅니다. 또한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본주의 종교에 묶인 사람들은 이 20절을 대하는 순간 ‘변화된 사울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용감하게 전도를 하는 구나’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이 이제는 예수를 사랑하고 전파하는구나’의 초점에 매몰되죠.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인본주의 종교인들의 초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시죠. 즉, 25절에서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도망가는 사울을 보여주십니다. 사울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자들은 이 장면을 애써 묵상하려 하지 않죠. 그들이 생각하는 엔딩은 ‘사울이 그들의 박해를 꿋꿋히 견뎌서 이겨내더라’ 혹은 ‘사울의 전도에 감화되어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더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장면으로 연출 되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울이 도망치는 것으로 이 에피소드를 마친 이유를 우리는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 만큼 복음은 방향성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 사울이 초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울의 비겁한 행동(도망)만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비겁한 사울의 행위의 장면을 통해 복음의 또 다른 ‘구원’의 속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 ‘그의 제자들’이라는 말의 ‘제자’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 자체를 가리키죠. 그리고 이 ‘광주리’는 방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방주는 다시 예수님을 가리키죠.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했지만 그 죽음에서 예수님(제자)의 구원(광주리)을 통해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사도행전의 방향성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울이 용감하게 전도했다. 사울이 비겁하게 도망했다. 이 두 가지 방향성은 결코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울의 이 두 가지 행위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설명하는 복음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25절에서 사울을 성벽에서 달아 내리는 장면은 구약 여호수아서 2장에도 매우 유명한 장면이 있죠. 성령께서 완벽하게 같은 장면으로 유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수아 2장도 짧게나마 묵상을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여리고 성에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죠. 그런데 그 정체를 들키자 기생 라합이 그들을 성벽 위에서 줄로 달아 내려서 도망가게 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가나안 땅의 여리고 성은 이 땅을 상징합니다. 즉, 인본주의를 의미하죠. 그리고 두 정탐꾼은 바로 ‘우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인생을 정탐하라고 우리를 보낸 것이죠. 우리는 이 땅에 와서 인생을 정탐하고 오직 복음만이 살 길이라는 것,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돌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줄(구원)에 달려 그 인본주의에서 탈출 하게 됩니다. 

 여기서 기생 라합도 성령(예수님)의 역할이 된 것이죠. 라합은 기생의 역할과 예수님의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되죠. 인본주의 논리로는 말도 안되죠. 그런데 왜 자꾸 성경은 이렇게 죄인과 의인(예수님)의 역활을 한 사람 안에 동시동존하는 형식으로 설명을 하실까요? 바로 이것이 나(죄인)와 예수님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한몸원리죠. 

 

 오늘의 묵상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대 주제는 '바울 처럼 전도 행위를 하자'가 아니라 어떠한 악당도 복음의 눈을 뜨게 되면 저절로 복음을 알게 되어 말하게 되고 복음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말을 하게 되는 기적, 걷게 되는 기적이 성경에 기재가 되어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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