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7:1-10(22.09.15.목)

은혜바라기 2022. 9. 15. 08:25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절부터 5절까지는 성령님의 전도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의 표지판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온 것처럼 성령께서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관례대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장면은 성령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그 말씀 안에 있는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니는 지역교회는 예수님께서 말하신 ‘그물’의 단계일 뿐입니다. 

 “마13:47-50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물은 천국이 보장된 곳이 아닙니다. 지역교회는 그물의 역할을 하는 것 뿐입니다. 즉,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는 모두 그물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이 성경을 읽는 시간이 될 수 도 있고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일요일마다 지역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도 될 수도 있고 넓게는 인류 역사와 인간의 인생 전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말씀이 떨어진다면 그 어디나 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그물에서 예수님께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갈라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심판과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갈라내는 작업을 표현한 것이 오늘 말씀의 4-5절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전했지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은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성령의 표지판)를 따른다고 나오죠.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불량한 사람들과 소동한다고 나옵니다. 정확하게 마태복음 13장 50절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 즉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가 그대로 적용된 장면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복음의 전파 과정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안식일’ 의 3은 성부,성자,성령, 즉 복음의 숫자죠. 안식일은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세 안식일이란 바로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주일성수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실체인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뜻입니다. 즉, 주일성수 자체가 이단은 아니지만 주일성수에 묶여 버리면 이단이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묶여야 합니다. 주일은 절대 성스럽지 않습니다. 주일을 성스럽다고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황금송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 안식일, 즉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을 통해 ‘말씀으로 강론하며’라고 2절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다음 3절에서 그 복음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3절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한절 한절이 다 정교하게 연결이 되죠? 

 이후 야손의 에피소드로 넘어가죠. 나쁜 물고기인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야손이 바울과 실라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관점을 뒤집어야 합니다. 야손이 나오면서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의 표지판에서 ‘나(교회)’의 표지판으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야손은 누구의 표지판일까요?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야손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돌보는 자, 즉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죠. 

 이 야손은 교회를 돌보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인본주의 종교인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의 품에 품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죠. 성령께서는 그 이야기를 야손을 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 중에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라고 하죠. 맞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떨어지면 인본주의 세상은 어지럽게 변합니다. ‘잘살기(이 땅의 행복)’가 최종 목표인 인본주의에 전혀 다른 메카니즘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이 땅의 모든 것이 ‘가치없음’을 알게 되죠.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기 위해 온 것임을 알게 되죠.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돈을 모아 나중에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를 품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인간은 결국 비참하게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답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축복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게 되는 것이 인생의 축복이기 때문에 노년기의 비참함은 이것을 매우 잘 느낄 수 있는 황금기죠. 이것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소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잠언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

" 잠언 20: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나이들어서 병들고 외롭고 약해지고 백발이 늘어나는 것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인생의 가장 황금기라는 뜻이죠. 이때가 가장 복음을 알아가기 좋은 시기라는 뜻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죠. 박해하는 자들은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왕은 이 땅의 왕과 전혀 다른 왕입니다. 곧 예수님이시죠. 재미있게도 성령께서는 이렇게 나쁜 물고기들의 주장까지 이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죠. 즉, 성경은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가 초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 무엇을 이용해서라도~~)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가 초점입니다. 

 9절에서 야손은 보석금을 받고 풀려 납니다. 이때 야손은 '죄인 된 나'의 표지판이 되며, 보석금은 예수님의 표지판이 됩니다. 즉, 예수님의 지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인본주의에서 풀려나와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같은 맥락입니다. 어떤 장면이 되었던, 성령께서는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하시는 것은 전부 성경에 기록을 하시죠.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본주의 상식과 논리로 읽기 때문에 그 안의 복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루를 짚어 보세요. 그 안에도 수 많은 복음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17:16-23(22.09.19.월)  (1) 2022.09.19
행17:11-15(22.09.16.금)  (2) 2022.09.16
행16:35-40(22.09.14.수)  (1) 2022.09.14
행16:24-34(22.09.13.화)  (1) 2022.09.13
행16:16-23(22.09.06.화)  (0) 20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