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 반복서론 : 인, 나팔, 대접이 첫째부터 일곱까지 나열된 것은 시간(역사)의 순서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고난을 그 속성 별로 나열한 것 입니다. 고난을 코끼리로 표현한다면, 코, 귀, 다리로 분리하여 나열한 것과 같죠. 하지만 우리에게 코끼리(고난)가 다가 올 때는 통째로 다가옵니다. 이 중 1-4까지는 동서남북(4)을 가리키는 이 땅의 관점에서 본 고난, 5는 율법과 행위의 갈등 관점에서 본 고난, 6은 인본주의 관점에서 본 고난, 7은 마지막 심판, 분리, 완성의 관점에서 본 고난을 의미합니다.]
숫자 5는 복음에서 모세오경, 즉 율법(말씀)을 의미합니다. 또한 율법은 항상 ‘행위’와 연결이 됩니다. 율법은 원래 인간이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절대 단 1개의 율법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기된 자들은 그 율법의 기준을 낮추거나 바꾸거나 포장하는 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율법과 행위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율법의 굴레에서 절대 빠져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과 행위의 갈등'을 계시록에서 ‘황충’으로 표현하여 그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 황충, 즉 율법은 전쟁을 위해 준비된 말들 같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영적 전쟁을 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속 사람을 계속 죽이지만 그 공간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만들죠. 이것을 복음서에서 ‘천국은 침노 당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율법(황충)은 머리에 금 같은 관 같이 ‘권위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얼굴 같이 인본주의 형식으로 다가 옵니다. 인본주의 문화, 법률, 종교, 논리, 지식 등등의 얼굴로 율법은 소개되고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황충)은 사자의 이빨과 같이 우리를 매우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철 호심경 같이 율법은 절대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 율법(황충)은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처럼 계속 우리를 공격합니다. 전갈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쏘면서 공격합니다.
11절, 이 율법(황충)에게 왕이 있는데 그 왕을 ‘무저갱의 사자’라고 합니다. 무저갱은 스스로 절대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바닥의 인본주의 속성을 의미한다고 했죠. 율법이 왜 무저갱의 사자일까요? 율법은 ‘행위’로 항상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행위’로 지킬 수 있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더 깊은 인본주의 바닥(함정)으로 자신을 인도하는 것이죠. 거꾸로 세워진 바벨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실체를 보고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이 함정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율법을 늘 ‘행위’로 받죠. 그래서 율법이라고 쓰고 행위라고 읽어도 됩니다. 그런데 11절, 이런 ‘행위’의 왕이 존재한다고 나오죠. 아바돈(헬라어:아볼루온)이라고 불리는 사탄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늘 행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 옛 자아는 사탄에 속하게 됩니다.
“엡2:2-3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욥기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가 율법입니다. 세 친구(율법)는 욥의 행위를 끝없이 따지고 욥은 세 친구에게 자신의 행위를 끝없이 변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욥은 '지옥같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계속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 친구와의 논쟁은 무저갱 처럼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욥은 죽지도 못한 채 괴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계시록의 '황충'의 속성과 똑같습니다.
이때 욥기에서는 갑자기 '엘리후'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욥을 혼내고 세 친구(율법)도 혼냅니다. 이 엘리후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마침내 성령께서 등장하여 욥의 눈을 뜨게 하시고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욥은 결국 성부 하나님을 보게 되고 대면하게 됩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하나 하나 그가 모르는 큰 세상(복음)을 가르치죠. 이후 욥은 복음에 하나 하나 눈을 떠가죠. 그로 인해 욥은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갑절의 축복은 '이 세상의 삶'에 '천국의 삶'이 더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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