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0:8-11(24.10.07.월)

은혜바라기 2024. 10. 7. 08:05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8절 ‘펴 놓인 두루마리’는 말씀(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가진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닌데~~ 천사라고 나와 있는데~~ 예수님하고 천사를 어떻게 동급으로 취급하는가? 예수님이 왕이라면 천사는 쫄병 아닌가? 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빨리 버리셔야 합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 무조건 예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증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정체성은 빛 보다 밝고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고 무지개보다 다채롭죠. 예수님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은혜)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벌거벗고 다닐 때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그 짐승의 가죽을 아담에게 입히셨죠. 이때 죽은 짐승이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이란 누구인가?'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 2천년 전에 오신 ‘인자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실체이자 본체시죠.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그것에 가장 알맞은 상징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중 계시록은 그 특성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온전하게 전달하는 순종자’라는 예수님의 속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천사’를 가져다 쓴 것이죠. 

 9-10절. 교회의 대표인 요한은 예수님께 복음을 받아먹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이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배에는 쓰다고 2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성경에서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강조하시는 것이므로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왜 복음은 입에 달지만 배에서 쓸까? 복음(복된 소식)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죠. 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노력하여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다 이루셨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일을 이루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등등 예수님의 정체성을 ‘앎’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받은 자들은 ‘자기 십자가’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정체성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고난의 행군 정도로 생각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불교의 수행, 이슬람의 순교, 힌두교의 고행과 같이 생각하면서 교회 내에서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한다로 해석합니다.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체성’을 가르치기 위해 성령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너무 말을 안 들으면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자식 나아서 키워봐라~~’라고 하죠. 그 이유는 그렇게 자신을 닮은 말썽쟁이 자식을 키우면서 고난을 거치면 그때서야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 고난은 예수님께서 다 겪으셨고 우리는 그 고난을 이해하는 수준의 작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애굽왕 바로는 ‘살찐 암소 7마리가 강에서 나왔지만 비루한 암소 7마리가 살 찐 암소를 잡아먹는 꿈’을 꿨습니다. 1차적으로 이 해석은 ‘풍년이 7년 온 후 흉년이 7년 오는데 흉년이 훨씬 큰 고난으로 다가 온다’이며 실제로 애굽은 그런 고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이 꿈의 본질적 해석은 성령께서 즐거움과 고난으로 선택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데 즐거움 보다는 고난이 훨씬 크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대표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삶을 살고 가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