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성경에서 숫자 2는 증거, 증명의 숫자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나의 죄됨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종교인들은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가지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라~~’로 해석하죠. 그들은 늘 자신이 기준이 되고 ‘행위’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에게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죄에서 절대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선택받은 자들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이후 이런 복음을 가진 선택받은 자들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시기에, 어떤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는가는 오로지 성령님의 계획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나는 100% 나의 옛 자아입니다. ‘나’라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전부 나의 옛 자아죠. 그렇다면 거듭난 나 혹은 새로운 피조물인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품입니다.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있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벗어난 영적 개념으로 보면, 거듭난 나는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후 2천년 후의 지금의 나는 그것을 성령께 들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영적인 개념을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3절의 두 증인이란 ‘예수님과 선택받은 나(교회)’를 의미합니다.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나의 옛 자아와 거듭난 자아로도 볼 수 있죠. 이 부분은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는 절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쉽게 ‘두 증인’이란 교회를 의미하는데, 교회의 여러 속성 중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나’ 혹은 ‘옛 자아와 거듭난 자아가 함께 있는 속성’을 설명하려고 기록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두 증인, 즉 ‘예수님과 교회’에게 권세를 주었죠. 그래서 예수님께 권세를 주었다고 생각해도 되고 그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자들에게도 권세가 주어졌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이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한다고 나옵니다.
1260은 어제 묵상에서도 말했듯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선택받은 자들의 ‘고난의 인생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달로 바꾸면 42달이고 년으로 바꾸면 한때 두때 반때(1년+2년+반년=3년 반)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42곳의 장소를 거쳐간 것과 예수님의 고난의 공생애 기간이 3년 반이라는 것도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모두 교회의 고난스러운 인생을 가리키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교회의 고난스러운 인생과 같다는 것도 은혜가 되죠?
그래서 오늘 두 증인도 ‘굵은 베옷’을 입고 나온 것입니다. 고난의 기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 죽음이죠. 그래서 죽은 후 입는 베옷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후 4절에서 매우 친절하게 ‘두 증인’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두 감람 나무’와 ‘두 촛대’라고 나옵니다.
이미 촛대는 계시록1:20절에서 그 정체를 ‘교회’라고 알려 준 적이 있죠. 왜 촛대가 교회일까요? 촛대는 초를 꽂는 도구죠. 초는 빛을 냅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촛대는 예수 그리스로의 집(성전=교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두 감람 나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의미합니다.
5절을 보면, 그들(두 증인=교회)을 해하려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나옵니다. 지금 교회는 두 증인이라는 속성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모습이므로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오직 구원은 십자가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 즉 교회의 정체성인 십자가를 박해하게 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권능으로 비를 오게도 하고 못 오게도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것을 ‘비가 오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교회가 복음을 전파해야만 은혜의 비(구원)가 내리지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재앙, 즉 파멸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교회의 능력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에 촛점이 있는 것이죠.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촛점이 있는 것이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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