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드디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는 개수나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모든 사건은 선택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매일 순서 없이 혹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그 숫자의 속성을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숫자 7은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일곱째 천사가 부는 나팔이란 복음적 완전성을 가진 알림(나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후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장면이 나오겠죠. 그래서 1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게 된다는 영광의 메시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보좌에 앉아 있던 24장로가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죠. 24라는 숫자는 12*2의 숫자입니다. 12는 교회를 가리키는 숫자고 2는 증거, 증명의 숫자죠. 그래서 24장로는 완전히 증명된 선택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보좌에 교회를 같이 앉히시겠다고 약속하셨죠. 그래서 천국에 있는 완성된 교회는 예수님이 주신 보좌에 앉아 있는 상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 지상에 있는 지역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을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
그런데 이 장면은 ‘묵시’입니다. 즉, 이미 태초 전에 완성된 영적 결과물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하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선택받은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의 거듭난 자아는 이미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지금 여러분의 옛 자아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시간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는 이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런데 그런 교회가 보좌에 앉아서 일곱 나팔, 즉, 완전한 복음이 진행된 과정들을 살펴보니 교회는 자신들의 공로가 단 1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는 자신이 보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오직 모든 공로와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보좌에서 내려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후 당연히 교회의 고백들이 흘러 나오는 것이죠.
선택받은 자들도 이 땅에서는 옛 자아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알게 됨’이라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됨’을 한 단어로 ‘믿음’이라고 하죠. 이것은 내가 ‘훌륭한 사람’ 혹은 ' 훌륭한 신앙인' 으로 점점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 중에서도 더 큰 죄인인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의 옛 자아와 거듭난 자아가 둘로 분리된 채 ‘이중 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죠?
여러분이 선택받은 자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단 1%도 거듭난 자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 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복음을 단 1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이 땅에서는 옛 자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는 100% 죄인의 삶 속에 허우적 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새로운 피조물(거듭난 나)로써의 나는 이미 예수님의 품 속에서 그 분의 지체로 살아갑니다. 단지 성령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그 분의 손끝으로 가리키는 나(옛 자아)를 바라보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무능한 죄인인가를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체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다는 것. 예수님의 지체가 나라는 것. 이 모든 개념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장님이 눈을 뜨고 난생 처음 ‘빨간 장미’를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다른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되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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