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1:9-12(24.10.14.월)

은혜바라기 2024. 10. 14. 08:12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은 선택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고난의 인생 기간’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3년 반을 42달, 1260일, 한때두때반(1년+2년+반년=3년반)처럼 여러 방식으로 표현하죠.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교회가 살아가야 할 인생 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42곳에서 정착하면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죠. 여기도 42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죽은 후 다시 부활까지 3일(계시록은 더 정확하게 3일 반이라고 표기하였죠.)이 걸린 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인본주의 무덤 안에  붙잡혀 있는 ‘고난의 인생 기간’을 더 강조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9절. 사람들이 선택받은 자들(교회)의 시체를 3일 반 동안 지켜보면서 무덤에 장사하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살게 됩니다. 그 옛 자아는 율법과 행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계속 ‘죄’가 드러납니다. 이 때 마다 옛 자아는 계속 죽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의 1세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늘 불평하고 범죄했고 그 때 마다 죽음을 당한 것을 아시죠? 1세대 60만명이 다 죽을 때 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 반복됩니다. 죄가 드러날 때 마다 나의 옛 자아는 계속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세상은 그 분의 죽음을 찬성하였죠. 교회와 예수님의 삶은 무게는 현저하게 다르지만 이렇게 같은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삼일 반 후에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생기가 선택받은 자들에게 들어가면서 부활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똑같죠? 결국 예수님의 부활 조차 선택받은 자들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받은 자들의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기도 하지만 진짜 초점은 그들의 인생 기간 동안 복음에 눈을 떠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후 12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마찬가지로 11-12절의 장면도 미래에 오실 예수님 재림 장면이기도 하지만 그 미래가 초점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이미 ‘묵시’속에서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묵시 속에서 완성된 것이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풀려 나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설명하면, 미래가 먼저고 현재가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매우 크게 들린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12절 중반 ‘듣고’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는 증상은 ‘복음이 들리는 것’입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런 증상이 반드시 나오게 되죠.

 이후 선택받은 자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나오죠. 구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시절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했던 에피소드를 기억하시죠? 고로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견인되어 천국의 길로 인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천국의 길은 예수님의 품(복음을 계속 알게 되는 삶)을 가리킵니다. 

 종합하면,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복음을 반드시 크게 듣게 되면서 성령님께 견인되어 계속 예수님의 품, 즉 예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 방식이 ‘고난’ ‘박해’ ‘옛 자아의 죽음’의 형태가 됩니다. 물론 교회의 대표이신 예수님께서 홀로 실질적인 십자가 죽음을 직접 당하셨죠. 선택받은 자들의 모든 고난은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기되어 종교인으로만 남아 있는 자들은 '고난을 이겨내게 해주세요~~' 가 마지막 목표가 되고 선택받은 자들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더 알 수 있게 해주세요~~'가 목표가 됩니다. 정말 끝이 다르죠? (이것을 다를 이, 끝 단 = 이단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