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1:13(24.10.15.화)

은혜바라기 2024. 10. 15. 08:2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직전 묵상 11절-12절의 내용은 죽은 것 같은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생기를 넣으니 교회가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어느 날 벌어질 일을 예언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죽은 자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그들을 다시 살리시면 그들은 성령님께 견인되어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후 오늘 13절의 내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땅’은 인본주의를 상징합니다. 이 땅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이 땅에 속한 그 어떤 것을 의지하면서 살게 되죠. 어떤 자들은 흙을 믿고 농사를 짓고, 어떤 자들은 돈을 믿고 돈을 벌고, 어떤 자들은 권력, 인기, 명예, 지식, 남편, 자녀, 인간관계를 믿고 그것을 위해 평생 노력합니다. 심지어 평생 ‘경조사’에 매여 사는 자들도 많죠. 이 모든 것은 ‘땅의 일’입니다. 땅에 속한 것, 즉 인본주의 가치들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의 근본인 ‘지구’마저 흔들어서 땅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지진’이라고 합니다. 물론 지진은 과학적인 이유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과학적인 이유조차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성’은 ‘집’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나무 사이로 숨은 것입니다. 이 ‘나무’가 최초의 집입니다. 또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최조의 옷도 일종의 ‘집’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성’을 쌓죠. 그래서 ‘옷, 집, 성, 나라’는 크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집'의 개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피해 자신을 지키는 인본주의 산물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께 쫓겨나 방황하다가 처음 시작한 일이 ‘에녹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성경은 인본주의 역사의 흐름을 소개하죠. 인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직업들이 소개됩니다. 대장장이 역사, 가축치는 자들의 역사, 악기다루는 자들의 역사 등등이 나옵니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인류 역사도 매우 간단하게 이해되죠? 

 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인본주의 역사가 소개되고 그 최초의 시발점을 ‘에녹성’으로 시작 했는데, 정확하게 같은 시점에 선택받은 자들의 역사도 함께 소개됩니다. 아담과 셋의 계보를 받은 선택받은 자들의 족보가 소개되죠. 그런데 이 계보 속에서도 같은 이름의 ‘에녹’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간 자로 등장하죠. 어떠세요? 성경이 유기된 자들과 선택받은 자들의 역사를 완벽하게 분리하고 동일한 이름의 에녹을 통해 정반대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보여지나요? 

 선택받은 자들의 계보 안에 있던 에녹을 잠시 묵상해보죠. 에녹의 자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의 의미는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글자를 파자하면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일어난다~~’라는 뜻이 들어 있죠. 그래서 에녹은 복음이 말하는 ‘심판론적 세계관’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매일매일 그 자식을 통해 하나님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식이 죽으면 심판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런 순례자적인 삶으로 인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간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듯 므두셀라가 죽던 날 ‘노아의 방주 심판’이 시작됩니다. 참고로 계보는 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 로 이어집니다. 에녹은 노아의 증조부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죄’란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나의 기준’ 혹은 ‘인간의 기준’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하죠. 이렇게 인간은 ‘나의 기준’으로 살게 되면서 나를 보호하고 타인을 배척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집(성)’을 짓고 사는 것은 ‘죄의 증상’입니다. 더 크고 좋은 집을 원하는 인간의 본질은 ‘죄의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10평에 살다 보면 30평에 30평 살다보면 50평에 살고 싶고 그러다 3층짜리 집을 짓고 싶어 하고 그러다가 ‘성’을 쌓고 ‘나라’를 건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 지진이 나게 하고 성 십분의 일을 무너지게 한다는 것은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후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 된다고 하죠. 이 칠천의 정체는 나의 옛 자아입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죠. 복음은 거듭난 나에게는 복된 소식이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후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죠. 즉, 옛 자아가 못 박혀 죽게 되면 그것이 거듭난 나에게는 복된 소식이 됩니다. 고로 거듭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