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광야로 도망간다는 것은 교회가 이 땅에서 광야같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샘플인 이스라엘도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죠. 이 모든 것은 선택받은 자들의 ‘고난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1260일은 42달, 한때두때반때(1년+2년+반년=3년반)와 같은 의미죠. 이것도 모두 교회의 ‘고난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광야가 공간적 의미의 고난의 인생을 가리킨다면 1260일(42달, 3년반)은 시간적인 의미의 고난의 인생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았던 공생애 기간도 고난 받는 교회의 인생을 강조하기 위해 동일한 시간인 3년 반을 사용하셨죠. 심지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 까지 죽은 채 바위 동굴에 갇혀 있던 시간인 3일 반도 교회의 고난 인생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선택받은 자들(교회)은 고난의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고로 예수님의 인생은 교회의 인생을 설명하고 교회의 인생은 예수님의 인생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자가 아이(예수님)를 양육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을 보살핀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시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42번의 장소를 옮겨 가면서 하나님을 배워나간 것과 동일합니다. (여기도 42곳이죠?)
선택받은 자들은 고난의 인생길을 걷게 되면서 하나님의 구름기둥(=성령)의 견인으로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가죠. 그러면서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의 이름과 공로는 쌓는 바벨탑을 지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3가지 시험인 재물(의,식,주), 권력(인기,명예), 종교(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리,박수받은 자리 )로 크게 3분류 할 수 있습니다.
이때 7절,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하늘 전쟁이 나옵니다. 미가엘과 용이 싸우죠. 이때 용이 져서 하늘에 있지 못하고 내쫓기게 됩니다. 이 장면 해석을 잘 하셔야 합니다. 정말 하늘에 큰 분쟁거리가 생겨서 미가엘과 용이 죽도록 싸웠을까요? 아닙니다. 미가엘도 용도 모두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의 수준 때문입니다.
7-9절은 ‘선악과 에피소드’에서일어난 일과 똑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선악과 에피소드의 본질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볼까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인간은 이미 죄의 증상이 먼저 나옵니다. 인간이 사탄과 함께 하나님께 반역을 꾀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왜, 어떻게 죄인이 되었을까요? 이게 어렵습니다. 그래도 말 나온 김에 묵상해 볼까요? (어려우신 분은 이중괄호 (( )) 는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
(( 하나님의 진짜 창조는 창세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지금이 진짜 창조죠. 고로 참 창조는 지금도 진행중(ing)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창조는 실제이지만 일종의 상징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인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상태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죄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인본주의)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알고 계셨죠. 그래서 어찌 보면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은 자발적이긴 하지만 자발적이 아닌 것이 되기도 하는 이상한 상태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설명한 것이 구약의 ‘도피성 에피소드’입니다.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에 와서 뿔을 잡으면 처벌을 면한다는 에피소드죠. 이 에피소드의 초점은 ‘고의가 아닌’ 과 ‘뿔’에 있습니다. 이 뿔은 예수님의 십가가를 의미하고 ‘고의가 아닌’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 인간은 이미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고의가 아닌 속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범해라~~’는 방향으로 밀어 넣은 것도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격으로 창조된 이유는 그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신 것이죠. 인간을 짐승이나 로봇으로 만드시길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어렵죠? 이 부분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핵심이 아니므로 이 정도만 이해하셔도 됩니다. ))
위의 (( )) 안에 있는 모든 영적 과정을 전부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그것은 복음의 핵심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왜, 어떻게, 언제 죄를 선택하게 되었는가?를 사탄이라는 도구가 등장하므로 매우 짧게 설명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탄은 거울에 비친 우리의 영적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미가엘과 용이 싸우고 쫓겨난 장면은 선악과 에피소드에서 사탄(뱀)에게 속해버린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장면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참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끝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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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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