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직전 묵상에서 나온 짐승의 정체는 ‘구체화된 인본주의’라고 했죠. 그런데 오늘 '또 다른 짐승'이 나옵니다. 오늘 나온 짐승도 마찬가지로 ‘구체화된 인본주의’입니다. 조금 다른 점은 직전 묵상에서 나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오고 오늘 나온 짐승은 땅에서 나옵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짐승의 정체인 인본주의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구분해서 동전을 설명하는 방식처럼 말이죠.
분명한 것은 사탄도 하나님의 도구이듯이 인본주의(짐승)도 마찬가지로 큰 범위에서 보면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인본주의는 그 자체가 죄의 본질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 은혜를 설명하는 도구 역할도 합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구절과 의미가 일맥상통하죠.
인본주의 최상위 꼭대기 층이란 이 세상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이 바랄만한 가치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인간이 보기에 최고의 가치인 “인본주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랑, 봉사, 희생, 효도, 충성, 종교 등등의 단어가 차지하고 있죠. 하지만 이런 인본주의 선의 본질은 참선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로마서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저 사람의 행위는 최고로 선하구나~~ 혹은 저 사람은 최고의 의인이구나~~” 하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인본주의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인본주의 종교 내에서 이런 속임수가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마태복음24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보거든 ~ 산으로 도망하라”
오직 거룩한 곳에 서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 곳에 다른 것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지금 함정에 빠져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산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여기서 ‘산’이란 소돔에서 탈출한 롯에게 천사가 ‘산으로 도망치라~~’의 산과 같습니다. 즉, 인본주의 세상에서 분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인간의 기준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을 떠났죠.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과녁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에게 “그럼 정말 너희가 원하는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증명해라~~ 만약 증명되면 천국의 삶을 주시겠다”고 하셨죠. 이때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본주의 꼭대기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기된 자들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죠.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서는 바리새인이라고 불렸죠.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하는 것, 율법을 1개만 어겨도 모두 어긴 것,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하는 것이라는 율법의 본질을 별도로 설명을 하여 우리는 절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해라~~ 라는 길로 안내 했는데 당시 그들은 오히려 그렇게 율법을 해석한 예수님을 죽였죠. 지금도 교회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이니다. 심지어 이때의 행위도 모두 외식으로 이루어진 기만과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 중 땅에서 나온 짐승이 ‘어린양 같이 두 뿔이 있고’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인본주의 종교(교회)는 예수님 흉내를 낸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용처럼 말한다’고 되어 있죠. 즉, 인본주의 종교(교회)의 본질은 사탄의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종교)는 절대 예수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도구일 뿐입니다. 첫째 그물일 뿐이죠. 구원은 이후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로 나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의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12절 초반에 힌트로 나옵니다. 나중 나온 짐승이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한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그 힘과 정체성은 이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 첫 번째 짐승이 죽게 된 상처가 나으므로’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하죠. 이 표현은 13장3절에서도 반복하여 나옵니다. 이렇게 두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인본주의가 가진 이런 특징 때문에 인간은 인본주의에 묶어 포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1절의 표현처럼 인본주의는 10개의 머리가 달려 있을 정도로 매우 많은 ‘인본주의 가치’가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은 그들이 원하던 인본주의 가치가 실패할 때 절망이 찾아오지만 뜻하지 않게 다른 가치가 이루어지면 그 목표에 더 더욱 묶여 버리죠. 인본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더욱 강력한 포로로 만듭니다.
예를 들면, 원하던 대학에 떨어져 절망하여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는 요리사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게 되면 그 가치는 더욱 위대한 가치로 다가 오기 때문에 이때 얻은 이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13절을 보면, 큰 이적을 일으키고 심지어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도 한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인본주의 최상층을 이루고 있는 ‘인본주의 종교’에 대한 속성입니다. 큰 이적과 불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종교적 속성의 유혹을 의미합니다. 이미 용의 정체는 사탄이고 사탄의 정체성은 ‘속이는 자’라고 12장에서 언급을 했죠. 그리고 사탄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 종교 '입니다. 사실 예수님 조차 '종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죠.
교회는 가장 최전선의 영적 싸움터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사탄의 속임수에 모두 휩쓸려버립니다. 사탄과 짐승은 매우 교묘하게 교회에서 조차 예수님을 전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교회 집단과 행위 그리고 종교라는 방향으로 우리의 마지막 행로를 바꿔버립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목사가 행위를 설교하더라도 그것을 듣는 자가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끝임없이 비판하고 묵상하여 그 행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할 수 밖에 없다는 참믿음에 도달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