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나온 두 가지 비유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구약과 신약 혹은 율법과 복음 혹은 상징과 실체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예레미야서에 매우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주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다’입니다.
낡은 옷과 생베 조각의 결합은 옛 언약과 복음은 절대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켜내는 ‘행위’를 반드시 요구합니다. 반대로 복음은 내가 절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행위를 해야 하고 하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하는 반대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둘을 붙여서 해석을 하면 모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복음적 신앙생활을 하면 오히려 그 헤어짐이 더 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선택받은 자들의 마지막 장애물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알게 된 선택받은 자들이라도 이 땅에서 옛 자아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 동안은 계속 신앙생활이라는 행위와 복음을 섞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적 모순이 찾아오게 되죠.
하지만 예레미야31장의 하나님의 선언 때문에 이때 마다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 속에 기록된 복음이 다시 선명하게 부각 되면서 헤어진 나의 상태를 감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이때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 속에 새 언약의 법을 주고 기록한다는 것은 ‘성령님의 견인’을 의미합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는 십일조라는 율법을 지키죠. 십일조의 행위가 아닌 십일조의 본질을 통해 복음을 보아야 하는데 십일조라는 행위가 복음대로 사는 것이다~~ 라고 연결하지 말라는 것이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을 결합하는 것이고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입니다.
이미 십일조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죠. 즉, 십일조는 낡은 부대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새 부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해석할 때 오직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만이 옳은 방향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래도 주일 성수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래도 맥추 감사절은 반드시 지키면서 그것을 잘 이용해서 복음을 해석하면 다다익선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오늘 두 가지 비유로 반복하고 강조하신 이유는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다 버리십시오. 오직 성경을 통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다 버리라는 것을 '하지말라'는 것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행위에 묶여 있는 자들은 다 버리라는 것도 '행위'로 받게 되면서 불교의 '무소유를 훈련하라~~'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어떻게 행위가 없는 신앙생활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요일에 교회에 매주 나가는 행위 자체도 매우 규칙적인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행위인데요. 그러니 '가지말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죠?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어렵지만 굳이 설명드리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그런 행위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했던 행위 면류관들을 모두 벗어 예수님의 발 앞에 던져버리는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복잡한 성령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지역교회는 종교 집단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실제 그들 중 선택받은 자들은 소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만든 종교를 사용하시죠. 그렇게 만들어진 지역교회, 그 교회 안의 사람들, 그들이 내는 헌금들, 그들의 봉사들을 모두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택받은 자들은 아닙니다.
심지어 선택받은 자들도 그들와 똑같이 교회 내 봉사를 하게 됩니다. 참 어렵죠? 즉, 나도 계속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꾸깃꾹깃 넣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복잡한 섭리 과정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항상 죄인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기된 자들의 생각은 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잘 붙이고 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잘 넣고 있다~~에 계속 묶여 있게 됩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옷이 헤어지고 부대가 터져나가는 상황 혹은 심경 혹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왜 이런 두 부류로 나누어 질까요? 그 이유는 예레미야에 나온 것처럼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에는 새 언약이 직접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님의 견인하심으로 인해 그런 증상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 증상으로 인해 항상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묵상 혹은 기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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