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진행중)

마가복음2:15-17(25.01.14.화)

은혜바라기 2025. 1. 14. 08:08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세리와 죄인들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는 장면은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미 태초에 결정되지만 그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은 옛 자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옛 자아는 유기된 자들과 똑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들은 세리이며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써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세리는 인본주의의 가장 핵심인 자본주의에 묶여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죄인은 인본주의 자체가 죄의 본질이므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죄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복음을 배우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을 나무라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선택받은 자들의 핵심 증상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선택받은 자들과 유기된 자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죄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의 정의’를 히브리 사전에서 찾으면 ‘과녁에서 벗어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과녁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입니다. 죄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아담의 허리에 있던 모든 인류는 아담과 같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며 그 분리된 상태, 즉 죄인의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하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 인본주의에 묶여 태어나고 자라게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을 이렇게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80년 동안 죄인의 삶을 살게 하셨을까? 즉, 우리는 태어날 때 부터 왜 감옥에서 사형수로 태어난 것일까? 우리는 80년 후로 예정된 사형 집행에서 그 누구도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내가 죄인의 상태이며 이런 죄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관점에서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지만 복음의 관점에서 인생의 목표는 ‘비참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인생감옥에서 조차 ‘인본주의’라는 세상을 만들어서 실제로 이룰 수도 없는 허상의 행복이라는 바벨탑을 상상하고 그것을 쌓아 올리면서 결국은 내가 행복(천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모든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모두 무너집니다. 

 심지어 인간은 나이가 들면 점점 더 늙고, 병들고, 약해지고 비참해 집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특정해서 만들어 놓은 핵심 질서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의 시간입니다. 인생 막바지 사형집행소로 가기 전이라도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늙어 외롭고 비참하고 약한 상태가 복음적으로는 사실상 가장 귀중한 시간인 셈이죠.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80년은 찰나의 시간이고 이 찰나의 시간이 영벌과 영생이라는 영원한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 자들 대신 예수님께서 이미 사형집행소에 가셔서 ‘아무개 대신 내가 대신 십자가 사형을 받겠노라~~ 그러니 아무개의 형 집행을 취소라라~~’ 고 하신 자들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인생 내내 단계적으로 이 사실(복음)을 성령께 들어 알게 됩니다. 

 그러니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행복하게 하소서~~’ 가 아니라 ‘저의 비참함을 알게 하소서~~’ 가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 비참함, 절대 고독한, 절대 빈곤함은 절대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 뿐입니다. 그 진실과 대면하기가 두려워 밖으로 꺼내지 않고 꽁꽁 숨기며 그것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뿐이죠. 이것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간혹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진실이 밖으로 뛰쳐나오는 경우가 있죠. 그러면 우울증, 고독감, 공항장애 등등의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원래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과정의 최종 목적은 ‘예수님 찾기’죠. 선택받은 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엘리야 조차 한 동안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간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유기된 자들은 예수님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상황까지 처하게 되거나 또다른 인본주의 가치를 쌓으면서 그것을 다시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이 땅의 것으로 치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다른 가치로 그 감정을 더 깊이 감추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히 치료되었다고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상태가 복음적으로는 더 심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다시 인식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그것을 설명하신 예수님의 비유가 ‘한 귀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는데 이후 일곱 귀신이 들어온 상태’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감옥에 있는 선택받은 자들을 그 감옥에서 꺼내는 것이지 그 감옥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감옥 생활을 성실하게, 근면하게, 질서있게, 칭찬받으면서 하는 것을 목표로 하죠. 성실하게 오늘도 감빵 청소를 열심히 해서 빵장님께 칭찬받아야쥐~~ 가 목적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 즉 인본주의 자체가 ‘죄’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만을 소망하며 오늘도 감빵 이불 안에서 킥킥~ 거리며 ‘나는 형벌이 이미 사해졌네~~’ 라고 진정한 평강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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