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완료)

약3:13-18(22.04.15.금)

은혜바라기 2022. 4. 15. 08:24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벌써 야고보서도 3장이 끝나네요. 이제 조금 서신서에 대한 감이 잡히죠? 어떤 방향성이 옳은 방향성인지 보이시나요?

 13절에서 묻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누굴까요?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또한 '선행(착한일)'이란 바로 '하나님의 일=복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라는 뜻은 '복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죠.

 

 그래서 13절을 풀어보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인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대신 와서 다 이룬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하고 계신 것이죠. 그런데 이 13절을 인본주의 종교관으로 바라보면  ‘그래~~ 착하게 지혜롭게 행동하도록 노력할 거야~~~’라고 해석하게 되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본질이 바로 ‘시기와 다툼’에 있다고 14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본주의 속성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인본주의는 바벨탑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계속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다퉈서 이기려 하죠. 이것을 심리학적으로는 ‘시기’라고 하고 행동학적으로는 ‘다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물, 학력, 권력과 같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더 잘 보살피고, 인류를 위해 더 희생하고, 남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하는 것 조차 ‘시기와 다툼’이 그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 ‘시기와 다툼’을 envy and selfish ambition, 즉 부러워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적혀 있죠. 

 이것은 선악과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보면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 라는 생각을 하죠. 이것이 바로 ‘enny’ 즉, 부러워하는 과정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 어떤 것을 노력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부자들이 부러워서 돈을 벌게 되고, 아이돌이 부러워서 연예인을 꿈꾸고, 권력가가 부러워 정치의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죠. 그리고 그들보다 더 좋은, 더 멋진 ‘나’를 만들기를 바라는 ‘selfish(이기적)’의 마음을 갖게 되죠. 

 더 높은 수준의 ‘envy, selfish’도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예를 들어보죠. 그 분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성인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죽일 놈’입니다. 이순신 장군 때문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일본의 부모와 아내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 올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높은 수준을 바라본 자들도 있죠. 평생 아프리카의 병자들을 돌본 슈바이쳐 박사와 같은 분도 돈과 권력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휼륭한 ‘자기 의’라는 업적을 쌓은 것 뿐입니다. 복음의 눈을 뜨지 못한다면 이순신 장순, 슈바이쳐 박사와 같은 분들의 위대한 업적이 사실은 '무가치함'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런 분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선택된 자들을 찾는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보면 이런 행위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시죠. 그리고 이런 행위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 슈바이쳐 박사 이런 분들의 행위가 모두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마 어마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시대에 오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휼륭한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2번 이상 금식을 하고 그 돈으로 과부와 고아를 돕고 목숨 바쳐 성전을 지켰고 목숨 바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죠. 그들은 이런 것을 제도화 시켰고 이런 성품 자체를 시험치는 것도 모자라 시험에 합격해도 인턴 기간까지 거치게 하여 철저하게 검증하여 바리새인이라는 자격을 부여하게 되죠.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끝판왕입니니다.

 

 반복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인, 최고의 인격자 그 이상의 인물들만 모아 놓은 시대가 바리새인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일부러 골라서 오신 예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신 것이죠.

 

  성경은 그런 바리새인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에게 '반대 편'의 역활을 부여했죠.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그 바리새인을 '나쁜 놈'의 안경을 쓰고 보기 때문에 바리새인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반대편은 일단 나쁜놈이라는 인식으로 작품을 보듯이 말이죠. 하지만 바리새인은 현대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되고 싶어하는 최고의 신앙인격자를 가리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복음과 정반대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참 복음의 자리는 바로 '죄인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5, 16절에 보면 이런 것은 땅 위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 모든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서신서는 정말 어렵습니다. 잘 이해를 하지 않으면 인본주의 서적으로 읽게 됩니다. ‘시기와 다툼이 나쁜 것이다.’ 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하지 않아도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치고 모든 종교에서도 가르치고 심지어 술 먹고 사람을 패는 나쁜 아버지도 아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치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은 바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비유로 말씀되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비유로 한 이유가 바로 ‘선택된 자들만 알아듣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죠. 즉, 인본주의에 묶인 자들은 ‘맞아~ 시기와 다툼은 나쁜 것이야~’라고만 생각하게 하여 계속 인본주의에 묶여 두게 만드신 것이죠. 심판입니다.

 17절도 예수님의 이야기 혹은 복음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18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는 의미는 위의 17절에서 말한 복음의 속성들을 알게 된 자들이 화평, 즉 예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의의 열매, 즉 예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맺게 된다는 것도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라는 인본주의 종교 해석으로 받으시면 안됩니다. 18절 ‘의의 열매를 거둔다’의 본질은 내 가치가 ‘0%’인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살아라’ 혹은 ‘예수님의 향기를 내라’ 등의 말은 내가 변화하여 좀 더 예수님같이 휼륭한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라는 것이죠. 

 이렇게 '난 예수님처럼 살 수 있어' 라고 마음먹고 그 분 처럼 혹은 하나님 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에피소드의 시발점이었죠.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이 바로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 과 '예수님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 두 방향성이 이제는 완벽하게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것이 보이시죠? 이렇게 길이 갈리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많은 교회가 이 부분에서 다 넘어가 있죠. 깨어 있어야 합니다.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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