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26-30절까지의 내용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어떤 장면을 설명하려는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그냥 ‘사울의 행적, 오해, 바나바의 등장, 사울을 받아들임’ 정도로 끝나는 에피소드죠. 그러나 이것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시는 성령님의 입술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울은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신부(교회,지체)를 찾아오시지만 그 어떤 신부도 신랑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죠. 여기서는 ‘다 두려워하여 믿지 아니하니’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성령의 표지판으로 나온 바나바가 등장하죠. 즉, 성령께서 예수님의 신부들에게 복음을 알려 주신 후에야 비소서 그 신부들이 신랑을 알아보고 믿고 따른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때 성령(바나바)께서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의 부분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늘 대면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 하셔야 하며,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이란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복음의 계획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 하셔야 하며,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의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다메섹)에 오셔서 그의 이름으로 복음을 완성하고 전파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알려주시면 우리는 그 때서야 28절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가 되는 것이죠. 이 구절도 ‘예수님과 그 분의 지체가 함께 관계가 회복되어 천국에 출입하며’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니 형제들이 사울을 다소로 피난시키죠. 이때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한 사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다소로 피난간 사울은 교회(나)의 상징이죠. 그리고 여기서 형제는 성령의 상징이 됩니다. 어렵죠? 그래서 제가 매일 이야기하는 ‘한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의 해석은 불가능 합니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과 같은 방식이죠. 이것은 이 땅에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이해하고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반듯이 알아야 할 개념이기도 하죠. 즉, 머리로 정립해서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라 성령께서 영적으로 믿게 만드는 개념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것으로 표현된 사울은 예수님이 되고, 그 박해를 피해 구원받는 것으로 표현된 사울은 ‘나(교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음을 모르면, 즉, 구원 받지 못한 유기된 자들은 이 예수님의 자리에 자기가 서 있죠. 즉, 예수님의 역할을 자기가 합니다.
성경에서 이 장면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된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세족식 에피소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절대 그러지마시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반대로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야 한다고 생각을 했겠죠. 인본주의 논리로는 아주 휼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는 자니라’입니다. 여기서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모두 멘붕이 와야 합니다.
교회에서 보면 어느정도 신앙 생활을 했다는 사람들은 저마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영향력을 끼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구원)을 주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느 날 박집사가 나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합니다. 보증을 서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성경은 보증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
이 잠언 말씀에서는 보증서지 말기를 권고하고 있죠.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잠언에서 말하는 보증이란 바로 예수님의 역할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인간은 보증을 설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풀면, 인간은 구원과 복음에 단 1도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구원과 복음에 1이라도 기여하겠다고 숟가락 한 개를 얹는 행위를 ‘보증’으로 바꾸어서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능력없는 자가 보증을 서게 되면 어떻게 되죠? 망하죠! 그래서 오직 보증은 능력이 되는 자, 즉 예수님만 설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나 때문에 손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런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는 구원을 받게 되죠. 또한 이 말씀을 복음으로 잘 알아듣게 되어 보증을 서지 않는 나는 평안, 즉 구원을 얻게 되죠.
그렇다면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박집사가 보증을 서 달라고 합니다. 보증을 서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이제 헤깔리시죠? 보증을 서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보증을 서 주시고 돈이 없으면 안 서면 됩니다. 이것은 그냥 인본주의 속 자본 능력 문제일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용해서 복음의 어떤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즉, 그 본질을 이해했다면 그 껍데기인 '보증'에 대한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하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도 성경은 바울, 바나바, 유대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을 복기하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선택받지 않은 자들은 단지 바울의 행적 쫓기에 머무르게 되죠. 즉, 전혀 다른 책을 읽게 됩니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그들이 복음을 아니까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죠. 조금 각색해서 말하면 성령께서 열어주신 만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하죠. ( 환상과 환청을 보는것은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
오늘도 말씀의 결론은, 성령께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전파하시어 마지막 31절처럼 천국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 오늘의 결말이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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