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오늘도 방향성부터 잘 잡고 시작해 봅니다. 32절의 베드로는 베드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사도’입니다. 주인공(예수님) 없는 미완성의 성경을 완성키기 위해 주인공의 역할인 ‘사도’가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초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떤 때에는 사도의 죄인 됨을, 어떤 때에는 사도의 예수됨을 사용하시죠.
그래서 32절의 베드로를 보고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의 방향성을 갖게 되면 안됩니다. 32절의 베드로는 성령님의 역할이므로 ‘성령께서 이렇게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대한민국에 있는 교회로 오셔서 그 안에서 최집사를 만나셨구나~~'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내가 교회에 와서 기도해서 성령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찾으셨다는 것이 이 구절의 초점입니다.
33절에 나오는 ‘애니아’라는 이름의 뜻은 ‘칭찬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자를 뜻합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가장 헌금 많이 하고, 가장 봉사 많이 하고, 가장 전도를 많이 해서 교회에서 가장 칭찬 받는 자의 대표로 33절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애니아의 상태가 ‘중풍병’입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가 마비가 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을 말하죠. 이것은 선택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인본주의라는 독에 마비가 되어 복음의 길을 걷지 못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병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애니아’ 즉, 교회에서 가장 많이 칭찬받는 자가 이 중풍병에 걸린 자로 묘사가 되었죠. 교회에서 가장 헌금, 봉사를 많이 해서 교인들에게 칭찬을 가장 많이 받는 자가 오히려 복음적으로는 인본주의에 묶여 영적으로 죽어 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잔인하게 말씀드리면 교회에서 가장 칭찬을 많이 받는 자는 바로 목사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벗어날 수 없는 인본주의 사슬이 바로 ‘신앙적 인기’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의 3대 시험 중 가장 마지막이 바로 이 시험이었죠. 예수님의 첫째 시험은 먹는 것이었죠. 먹는 것은 인간 세상의 모든 의, 식, 주에 관한 시험, 즉 물질적 욕심에 관한 시험을 말합니다. 두 번째 시험은 이 세상의 권력에 대한 욕심을 시험합니다. 세 번째 시험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성전 위에서 뛰어 내려라, 그러면 천사가 받쳐서 수종 들게 되어서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칭찬(우러러 본다.)한다는 신앙적 욕심 즉, 종교적 욕심에 관한 시험을 말합니다.
(( 약간 본론에서 벗어나서 한가지 더 말씀을 드려야 겠습니다. 이 예수님의 3대 광야 시험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상의 모든 시험을 받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본질적 시험이 이 시험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즉, 이 시험은 이중 메카니즘을 가진 시험입니다. 즉, 이 시험의 진짜 핵심은 바로 예수님이 ‘인자’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리’로 다시 복귀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재물의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시험을 잘 생각해 보세요. 40일을 금식한 예수님에게 사탄이 와서 음식으로 유혹하는 시험이죠. 그런데 만약 ‘음식에 대한 유혹’이 본질이라면 예수님 앞에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라면과 신김치’를 가져다가 놓고 먹으라고 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 시험은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으라’는 것이었죠.
만약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만들 능력이 있는 하나님임을 드러냈다면 ‘인자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 예수님’이 되어서 십자가 재물의 자격이 박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구원을 물 건너 갔겠죠.
두 번째 세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죠. 사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너무나 잘 압니다. 또한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는 것도 잘 압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욕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전략을 짜서 그 분이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어 인자 예수님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본 목적이었죠. 그래야 모든 인간이 사탄의 수중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능력을 봉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상대하신 것입니다. ))
34절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 우리의 구원에는 우리의 ‘행위’가 1도 필요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오셔서 ‘일어나라’라는 한마디 선언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간단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회에서 ‘선행의 탑’을 쌓아 그 허전함을 매꾸는 것이죠.
그렇다면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고 일부는 이렇게 반문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설명과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 할 수 있는 유일한 답는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의 일종’입니다. 즉, 유기된 자들은 이 쳇 바퀴에서 결코 영원히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 지, 묶일 옥을 쓰는 지옥은 이 땅의 인본주의 논리에 영원히 묶여서 사는 것을 말하죠.
이와 같은 상황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복음을 가르치다보니 나중에는 제자들이 도무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죠. 그래서 예수님께 직접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게 됩니다.
"요6:28-2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예수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계속 보시면서 묵상하세요. )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9:43-10:35(22.07.19.화) (0) | 2022.07.19 |
---|---|
행9:36-42(22.07.18.월) (0) | 2022.07.18 |
행9:26-31(22.07.14.목) (0) | 2022.07.14 |
행9:19-25(22.07.13.수) (0) | 2022.07.13 |
행9:10-19(22.07.12.화) (0) | 2022.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