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오늘도 묵상의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직전 묵상의 방향과 조금 다른 방향성입니다. 오히려 직전 묵상의 의미 때문에 오늘 해석이 어려워 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나오죠. 어제는 ‘애니아’라는 사람이 나왔죠. 애니아라는 이름의 뜻은 ‘교회에서 칭찬 받는 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를 ‘중풍병’으로 묘사되었죠. 즉, 교회에서 칭찬 받은 행위가 인본주의에 묶여서 병이 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런 애니아를 셩령께서 낫게 하시는 장면이 어제의 복음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나온 ‘다비다’라는 여제자는 어제의 ‘애니아’와 전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다비다’를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이름을 두 개를 부여하고 시작하시죠. 이것은 거듭난 자라는 뜻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도르가'라는 여자의 행위가 촛점이 아니라 도르가를 이용한 성령님의 가르침이 촛점입니다. 이 두 가지 상황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즉, 도르가가 '선행와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는 말을 역사의 시간으로 살펴본다면 도르가가 남을 많이 도와 주는 착한 일을 많이 했겠죠. 그러나 이런 착한 일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이 세상 인본주의에서도 종종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일입니다.
또한 '도르가가 더 특별히 선행과 구제를 했다.'라는 방향성도 아닙니다. 우리의 촛점은 성령께서 이 도르가의 행위를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선행은 착한 일, 즉 복음을 가리키고 구제는 구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행은 인본주의 정의에 의한 해석이 뿐입니다. 그러나 선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선행을 하신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오직 복음만을 위한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선행의 정의는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선행과 구제에 관련된 도르가가 죽었죠. 즉, 복음에 관련된, 즉 복음에 의해 선택받은 자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상징으로 나오는 베드로가 와서 살리게 되죠. 즉, 도르가의 에피소드는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9절에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에서 ‘속옷과 겉옷’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이자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죠.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려면 잠깐 복음서를 묵상해야 합니다.
“마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많은 기부를 해야 한다.’ 정도로 알아 듣죠.
그러나 이 말씀의 본질은 '누가 성경 말씀을 알고자 하여 말씀의 겉모양에 흐르는 뜻을 원할 때 그 겉모양의 뜻만 아니라 그 말씀의 속 안에 흐르는 복음까지 알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5:40에서 속옷과 겉옷이 가리키는 것은 그 위치가 촛점이 아니라 중요성이 촛점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에서는 조금 헤깔리죠. 광야가 많은 이스라엘에서는 속옷보다 겉옷이 생명을 살리는 더 중요한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에 중요도가 약한 속옷을 달라고 할 때 중요도가 강한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더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즉, ‘너를 고발하여’의 부분이 바로 ‘인류 전체가 예수님을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 받는다 할찌라도’의 뜻이고 그 이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더 중요한 말씀의 본질(겉옷)인 복음을 우리에게 주어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5:40절을 복음으로 해석하여 기억하는 자들은 오늘 사도행전의 다비다가 죽기 전에 그녀가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고’에서 ‘아~ 그렇구나.~ 다비다는 말씀의 겉 모양 뿐 아니라 말씀의 본질인 복음까지 알고 있었던 선택받은 자였구나~~’를 눈치 챌 수 있게 되죠.
40절에서 성령의 상징 베드로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라는 부분은 구원은 오직 성령께서 홀로 담당하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보통의 교회에서 ‘내가 기도해서 이 사람을 구원시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인간은 이 수준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죠.
이후 성령께서 기도하여 그 선택받은 자를 영적으로 살리시는 모습으로 다비다를 부활시키시죠. 다비다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복음의 속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방식으로 육체의 죽음에서 결국 부활될 것임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죠.
41절에서도 굳이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라고 표현한 것도 잘 살펴야 합니다. '성도'란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무엇과 구별된 것일까요? 정답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과부란 남편이 없는 사람들을 말하죠. 남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을 잃어버린 선택받은 자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모든 단어 하나 하나가 전부 복음을 설명합니다.
이후 오늘의 결론도 42절 성령께서 온 옵바 사람을 믿게하는 장면으로 끝 맺음 하시죠. 천국의 확장을 가리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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