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1:11-18(22.07.22.금)

은혜바라기 2022. 7. 22. 08:38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의 연결입니다. 어제 너무 길어서 어제와 오늘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를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부정한 짐승인 ‘나’를 사랑하여 그분의 품으로 품어 구원하신다는 것이 그 초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라는 표현과 오늘 시작하는 11절 ‘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라는 ‘3(셋)’의 표현이 계속 등장하는 것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보면, 뜬금없이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라고 되어 있죠. 성경에서 ‘6’은 ‘인본주의’를 뜻합니다. 즉, 완벽한 부정한 짐승들인 ‘나’를 뜻합니다. 이 여섯 형제도 같이 가서 구원을 받게 되죠. 즉, 내가 하나님의 복음의 계획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16절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을 풀어보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모든 세례는 오직 성령세례뿐입니다. 원래 ‘물세례’라는 것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16절에서 일부러 구분하려 기재하신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오셔서 나에게  ‘넌 예수님의 지체야~~’라고 알려 주시고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계속 가르쳐 주시면서 인생을 이끌고 나가시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본주의 가치를 상실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 소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 땅(인본주의)에 묶여 살던 내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영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 ‘물세례’입니다. 즉,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본주의에서 죽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며,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복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의 의미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물로 세례를 베풀어 그 의미를 설명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닙니다. 의미적 순서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 성령강림 이전에는 성령께서 활동을 안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천지창조 전부터 관여하셔서 모든 시대에 복음을 들고 활동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특별하게 강림하신 이유는 ‘그 무엇’을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특별하게 만드신 일종의 연극 무대입니다. 그러면 그 무엇이 무엇일까요? 

 바로 선택된 자들은 인생이라는 한시적 '공간과 시간'을 통해 이러한 의미적 순서로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미 선택된 자들도 처음에는 ‘요한의 세례’처럼 말씀을 ‘행위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기독교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게 되죠. (사실 이 부분은 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길기 때문에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즉, 성경을 읽고, 더듬더듬 행위(헌금, 봉사,..)를 시작하며, 예수님을 글로 읽고 이해하게 되는 수준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어느 순간 복음으로 직접 이해 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선택받은 사람은 태어나서 부터, 교회에 등록을 하던 안 하던, 심지어 방탕한 삶을 살더라도 성령께서 그 모든 순간을 견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유기된 자들에게는 성실한 삶 조차도 하나님의 방향에서는 '방탕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선택된 자들에게는 '방탕한 삶' 조차도 그에게 필요한 성령님의 견인의 삶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 히브리어의 '방탕'이라는 말은 '낭비'라는 뜻입니다. )

 

 즉, 시간적 순서로는 탄생 > 교회 출석 > 성령 강림의 순서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의미적 순서로는 인간은 절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16절에서 그 의미적 순서를 시간적 순서로 풀어서 설명하여,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가 아니라 이제 부터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라고 표현이 된 것입니다. 어렵죠?

 17절에서 나온 선물의 의미는 ‘복음’입니다. 혹은 그 복음을 가지고 오신 ‘성령’입니다. 혹은 그 복음의 결과물인 ‘구원’입니다. 혹은 그 복음의 실체이며 주인공인 ‘예수’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방향에서 보는가의 차이일 뿐 모두 같은 길에 있는 것입니다. 

 18절 보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잠잠하여’라는 말씀이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말이죠? 원래는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 말을 듣고 열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되어야 합니다. 왜 잠잠할까요? 

 인간이 참 복음을 알아듣게 되면, 교회에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아닌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내가 하는 신앙 생활’이 기준이었다면 복음을 알게 되는 순간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자세’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잠하여’ 지게 되죠.

 

 그러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진 인본주의자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 ‘그래~~~ 앞으로 교회에서 잠잠해야겠다.~~’라는 ‘잠잠하는 행위’로 다시 초점을 맞추죠. 이제 아시겠죠?  그들은 행위의 쳇바퀴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이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회자되는 구절 중 "고전:14: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 이 구절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오직 구원은 예수님 홀로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특정 짓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표현된 여자가 '내가 구원을 위해 그 무엇을 해 보겠다'라고 발버둥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믿으면 되죠. 이렇게 예수님만을 믿으라는 것을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표현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8절 후반부를 보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나옵니다. 이제 이 회개의 무게를 아시겠죠? 회개는 반성과 다릅니다. 교회에서 울고 짜는 대부분의 행위는 대부분 반성입니다. 반성은 불교, 이스람교, 힌두교뿐 아니라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매일 벌어지죠. 교회에서는 그 반성하는 자들을 가리켜 은혜받았다는 ‘뻥’을 치죠. 그 ‘뻥’을 치는 대부분이 교사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 많은 반성은 장례식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반성은 ‘내가 변해서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더 잘할 것을 다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내가 변할 수 있다. 내가 변해야 한다.' 는 것이 초점이죠. 그러나 회개는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 죄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반성과 회개는 그 본질이 서로 반대 방향에 서 있는 셈이죠. 

 반성은 ‘나에게서 다시 새로운 나에게로’ 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회개는 ‘나에게서 예수님께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인 ‘생명 얻는 회개’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서 울고 짜면서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내가 더 잘해줄 텐데~~’라고 반성을 하는 사람은 아직 복음의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 그 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시 살아오셔도 나는 더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죠. 이것을 확장시켜 생각하면, 우리가 아담으로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결국 똑같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예수님이 필요한 죄인의 위치가 될 것이라는 진리를 알게 되죠.  이것이 인간의 진짜 본모습을 들여다본 선택받은 자들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는 것'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 눈을 떠서 진짜 인간의 본모습을 확인하시고 '희망없음' '가치 없음'을 발견하세요. 그래서 오직 예수님이 오셨다는 그 사실에 '정말~~ 정말~~ 다행이다.~~'의 탄성을 지를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을 '복된 소식(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계속 보시면서 묵상하세요. )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12:9-11(22.07.27.수)  (0) 2022.07.27
행11:19-30(22.07.25.월)  (0) 2022.07.25
행10:36-48(22.07.20.수)  (0) 2022.07.20
행9:43-10:35(22.07.19.화)  (0) 2022.07.19
행9:36-42(22.07.18.월)  (0) 2022.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