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1:19-30(22.07.25.월)

은혜바라기 2022. 7. 25. 07:51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오늘의 말씀도 인간의 종교에 초점을 맞추시면 안됩니다. 성령께서 이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그 방향성을 잘 보셔야 합니다. 어렵죠? 그러나 쉽습니다. 그 방향성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 길은 옳은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9절 스데반의 일로 환난이 나서 크리스챤들은 모두 흩어지죠. 이렇게 흩어진 크리스챤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 흩어진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환난이 복음의 확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죠. 절대 인간은 이런식의 계획을 세우지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모이자’ ‘잘하자’ ‘잘살자’에 초점을 맞추죠. 그것이 인간들에게 ‘선’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못살자’라는 환난을 주어 ‘흩어짐’의 결과로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을 지금 보여주십니다. 절대 전도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19절-21절의 초점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선택’의 정의를 그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었죠. 하나님이 모든 구원받을 백성, 즉 교회를 위해 선택하신 셈플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즉, 사과 한 박스를 사야하는데 그 중 한 개의 셈플을 먹어보고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때 촛점은 이 셈플이 아니라 사과 한 박스에 있죠. 이스라엘의 위치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착할 선, 즉,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선’은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품성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간직하고 있는 품성이죠. ‘선’의 정의는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모두 선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참이죠. 우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어린아이까지 죽였다는 뉴스를 보면 ‘착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방인의 모든 가축과 어린아이까지 죽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이것은 ‘선’입니다. 왜 선일까요?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의 많은 지역에서 이방인을 다 죽이기 못하고 살려두죠. 그 대표적인 부족이 블레셋 부족이었죠. 결국 훗날에 이 블레셋에서 골리앗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고 이스라엘은 그 골리앗에게 수모를 당합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기가 담긴 여호수아의 다음 성경인 사사기입니다. 

 이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남긴 이방 사람들과 섞이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죠. 각종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가 됩니다. 인간이 가장 오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착하다’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제 이 ‘착하다’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따르는 사람’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선하시죠. 

 그래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라고 성경이 선언한 것은 바로 ‘바나바를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중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이유가 바로, 바나바의 행위들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이방 교회에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 때문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진다고 표현되어 있죠. 그가 사울(바울)을 교회에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지체로 만들죠. 또한 많은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역할을 바나바가 해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바나바라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의 성과나 업적을 찬양하는 것에 묶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의 시작 전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선언된 것입니다. 측, 바나바는 예수님의 표지판의 역할을 수행중이라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중 26절 하반절에 보면,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되어 있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왜래 단어에서 중국의 소리만 차용하여 표기한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즉, 기독교라는 뜻은 바로 그리스도교, 즉 ‘예수님의 지체들’이라는 뜻입니다. 

 27-30절까지는 조금 특별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습니다. 아가보라는 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것이라는 예언을 하죠. 그랬더니 글라우디오(로마4대 황제) 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복음과 조금 어긋난 듯한 이상한 문맥이 등장하죠? 그러나 배경을 아시게 되면 정확하게 이것도 복음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로마에서 모든 기독교 유대인을 쫓아낸 인물입니다. 기독교 사상을 ‘염병’이라고 규정하고 많은 박해를 하면서 쫓아냈죠.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방향에서 보면, 추수를 해야하는데 추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서 하나님이 추수할 대상은 ‘선택받은 자들(교회)’을 말합니다. 그래서 ‘흉년’이 든 것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제로 ‘농사’마저도 흉년이 든 것이겠죠. 그런데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먹거리 흉년’이 아니라 ‘복음적 흉년’으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도구를 사용하여 결과를 보여주는데 그 도구에만 묶여있으면 안됩니다.)

 29-30절 보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겉 표면은 ‘어떤 교회가 어려우니 다른 교회에서 돈을 모아서 보내주었다.’입니다. 이 28-30의 말씀 때문에 지금 현대에서도 교회가 교회를 돕는 일을 많이 하죠. 그러나 만약 그 본질을 놓치고 오직 이 ‘돕기’에만 묶여 있는다면 그것은 그냥 ‘인본주의 종교’일 뿐입니다. 이런 것은 어떤 종교에나 다 나타나는 '불우이웃 돕기' 현상일뿐이죠. 

 28절의 아가보 예언은 ‘복음적 흉년’을 가리키는 것이 말씀의 본질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29-30절에서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부조를 보낸다는 것의 본질은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울을 통해 로마로 복음이 보내질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결국 바울의 마지막 복음 전파지, 즉 그가 마지막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한 장소가 바로 ‘로마’였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기독교 유대인을 내 쫓아서 ‘복음 흉년’이 든 로마에 바울이 복음(부조)을 들고 찾아가서 전달하는 것으로 바울은 사명이 끝나죠. 

 이 짧은 세 구절을 통해서도, 우리가 ‘착한 일하고, 남을 돕고, 교회를 돕자.’ 의 구절을 인본주의 방향성으로 해석하는 것과 복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죠?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종교와 생명의 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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