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2:9-11(22.07.27.수)

은혜바라기 2022. 7. 27. 08:31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9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환상을 보는가?’라고 여깁니다. 이것도 성령께서 성경에 기재를 하셨다면 틀림없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묵상을 해보셔야 합니다. 

 즉, 어제 묵상에서 베드로가 가리키는 ‘나’의 구원 과정이 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환상’으로 여길 정도로 믿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 묵상을 계속 보시면서 고개를 끄떡끄떡하시는 분들도 소수 계시겠지만 복음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게 뭐야?~~~~~’라고 생각을 하실 수밖에 없죠. 

 최초의 신학은 복음을 깨닫고 그 단계에 와 있는 자들의 시선에서 집필이 되어 교육을 했겠죠. 그러나 그런 신학을 교육에 활용한 후대의 인물들은 대다수가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는 자들입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 더 깊은 복음의 목소리를 청종하기 위해 신학을 배우는 것 보다는 기독교 종교학을 배워 목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신학을 배우는 것이 더 큰 목적이라는 것이죠. ( 아닐 것 같죠?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의 시대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잘 생각하세요. )

 

 이 안에서 그것을 교육받고 나온 수 많은 목사들이 과연 올바른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설교를 듣고 자란 신도들은 과연 복음을 알 수 있을까요?

 

 이런 환경에서 성도들은 절대 복음을 알 수 없겠죠? 그러나 이 대답은 “땡”입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선택받은 자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알아듣게 됩니다.’ 모든 환경이 검은색만 있는 곳에서 그 검은색을 통해서 오히려 흰색의 의미를 알게 되는 자들이 생겨나죠. 완벽하게 성령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목사가 하지만 성령께서 그 입에서 나온 모든 소리를 '가공'해서 복음으로 설명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현상을 오늘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환상’을 보는 듯하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10절 ‘쇠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인본주의의 굳게 닫친 문이 열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저절로’라고 되어있죠.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 자주하는 실수는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그 복음을 이해하는 노력에 또 매몰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논쟁 자체가 다시 복음의 초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 못 하는 상황으로 빠뜨린다는 것입니다. 어렵죠? ) 

 인본주의를 벗어나는 환경은 ‘저절로’ 찾아옵니다. ‘코로나’라는 환경을 통해서, 어떤 지인의 한 줄 복음에 의해서, 어떤 TV뉴스를 통해서, 자식의 행악을 통해서 , 부모의 죽음을 통해서 등등 

 물론 복음을 이해하려고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복음의 특성 상 그런 노력을 통해서 복음의 수준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확장’이 될 뿐이죠.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천국, 즉 복음의 진영을 표현한 성경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가나안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나안 입성’ 뿐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끝난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란 단지 ‘확장’ 작업뿐이죠.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 확장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겠죠. 나의 지파가 많은 땅을 확보하고 남의 지파가 적은 땅을 확보해야 비로소 만족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점은 12지파가 가나안에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모두 예수님(예수님의 지체)이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촛점, 즉 방향성이 가장 큰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품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그분이 그 모든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 그래서 우리가 높아졌네~~ 낮아졌네~~ 라는 개념은 복음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복음이 확장이 되었네~~ 라는 개념만 존재하죠. )


 심지어 우리는 흔히 '요즘 믿음이 높아졌네~ 낮아졌네~'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하죠. 그러나 믿음은 그 속성 상 높아질 수도 낮아 질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믿는다(알게 된다)’가 맞는 말이죠. 그래서 믿음은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가나안 땅의 확장 에피소드’입니다. 결국 내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땅이 확장되는 것이죠. 결국 예수님이 허락하신 ‘앎(믿음)’으로 인해 ‘그래 너는 그 땅까지 확장하렴~~’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기다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의 고백이 바로 11절입니다. 이 11절이 바로 구원받은 백성의 고백이죠. 이 고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원받은 자들, 즉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앎(복음을 앎)’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복음이죠. 그래서 우리의 기준으로 믿음이란 바로 ‘복음을 알게 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실체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부분은 복음의 진영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아~~ 이거구나~~’ 하고 딱 알게 되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믿음이라는 감정에 집중에서 그 마음을 열심히 갈고 닦는 것'으로 이해를 하죠. 그러나 절대 믿음은 그런 식으로 갈고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어느 날 내가 '복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즉, '앎'이 오게 되죠. 말 주변 없는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면 아마도 ’그냥~~ 알게 되었는데요~~' 정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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